참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에게 착한 것은 옳은 것이고 안전한 것이었다. 나의 욕구보다 상대의 욕구에 민감했다. 때로는 상대를 위해 나의 욕구나 필요도 과감히 버릴 수도 있었다. 나에게 착하다는 것은 선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 나의 삶을 더 의미 있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생각은 어찌 보면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참지 않고 착한 척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나는 오래도록 내가 착하다고 생각을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착각할 수 있었던 것은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착하다는 평가에 맞춰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른들 말을 잘 듣기 위해 노력했고 칭찬을 듣기 위해 거짓말도 종종 했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는 말에 장미란 선수나 된 것처럼 힘센 척도 했다. 칭찬을 받는 나는 살아갈 만한 존재로 느껴졌고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칭찬에 목메어 살고 있을 때 네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들도 몰랐을 것 같다.
학교에서 만나는 다양한 아이들은 대체로 솔직하다. 참지 않는다. 이렇게 착한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를 사춘기 아이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책 없이 마냥 솔직했고 자유로워 보였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서슴없이 표현하고 뒷일은 나 몰라라 했다. ‘아이씨, 뭐래?~’이런 말을 듣는 건 익숙해졌다. 상처는 내 몫이었다. 나는 참고 이해해 주는 ‘착한’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하는 데 아이들은 내가 착하든, 착한 척을 하든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약발이 먹히지 않을 때 난감하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났다.
어느 날이었다. 1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신체발달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교실을 시력검사, 키와 몸무게등을 측정하는 임시 검사실별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검사실로 마련된 교실로 이동하면 검사를 하였다. 이런 행사를 할 때면 준비할 것도 많지만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게 뻔해서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그날따라 몸까지 안 좋았다. 중학교 3학년 남자아이들이 소란한 것은 기본값이라 뭐 대수롭지 않았지만 몸이 힘드니 여러 번 말을 듣지 않는 것에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종민이(가명)는 지각, 조퇴 등을 밥 먹듯 하는 아이라서 학교에서 모르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이다. 나는 시력검사를 하기 위해 조용히 하라고 했다. 아이들이 시력검사판에 있는 글자나 그림을 말하는 소리가 안 들릴 정도도 떠들어댔다. 여러 번 조용히 하라는 말에 종민이도 듣기가 싫었던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제기랄 뭐래!’
나는 한번 꾹 참고, 유치원생도 알만한 이유를 친절함을 한 스푼 묻혀 설명했다. ‘떠드는 소리 때문에 시력검사 하는 소리가 안 들리니까 조용히 있어’ 종민이도 나처럼 그날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지 않고 계속 욕을 했다. ‘병신!, 뭐래, 지랄하고 있네!’ 이 말까지 듣고 나니 뚜껑이 열렸다. ‘놓지마, 정신줄’이라는 만화 제목처럼 놓지 말아야 할 것을 놓았다. 뭔가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그리고 무슨 용기인지,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내 인내의 한계치를 넘었을 때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욕을 해!’ 젖 먹던 힘까지 모아 소리쳤다. 다시없을 사건이다.
다음날 전체 직원회의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회의 끝에 ‘선생님들 많이 힘드시죠. 우리 학교가 학군이 많이 안 좋다 보니 생활지도가 어려운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입니다. 아이들 지도에 선생님으로서 품위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내가 망각한 것은 내가 착한 선생님이라는 캐릭터 말고도 우리 교실 바로 옆이 교장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악! 소리치며 발버둥 쳐봤지만 부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의 중재로 쌍방 사과를 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참지 않고 괜찮은 척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사과가 나왔다. ‘종민아~ 정말 미안해…. 내가 더 어른스럽게 굴어야 했는데... 너무 솔직했다!’, 종민이도 ‘저도 욕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서로 쿨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부끄럽지만 시원했다. 처음 느껴보는 후련한 기분이었다. 다 비워진 듯 내 마음이 깨끗한 게 느껴졌다. 늘 참기를 기본값으로 했을 때 찜찜했던 여운과는 다른 후련함이었다. 종민이에 대해서도 예전 같으면 다시 보기 싫었을 텐데 편안했다. 그냥 종민이도 나처럼 뭔가 참기 힘들었겠지 싶었다. 굳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처럼 너도 그랬나 보다. 가끔 맑은 하늘에 떨어지는 우박 같은 그런 희한한 날….
착한 선생님의 기본기는 참기이다. 때론 발작 같은 아이들의 행동에도 무덤덤해야 한다. 일일이 반응하다 보면 살 수가 없다. 어떨 때는 참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착하게 오래 살다 보면 점점 욕구가 없어진다. 별기대도 없고 뭘 원하는지 찾는 게 어려워질 때가 있다. 더 정확히는 착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맞춰 산 것이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을 하며 착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나는 착한 선생님이 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어설프고 어렵고 용기가 무척 필요하지만 ‘솔직한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아이들만큼 모범적인 선생님도 없다. 아이들은 참 솔직하고 맑다. 솔직하게 말하는 나로 산지 이제 10년 되었다. 나는 10살이다. 머리로는 굳은 결심을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늘 용기가 필요하진 않지만 어떨 때는 손에 땀이 나기도 한다. 실천은 미숙한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잘 안되고 접어질 때도 있지만 솔직한 만큼 가슴이 펴지고 나로 사는 기분이다.
두려워하는 나에게 ‘이제 나는 엄마도 없었던 어린아이가 아니야. 나는 잘 성장했고 어른이 되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어’라고 내 마음에 말을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말하는 걸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해준다. 심호흡을 한번 조용히 하고 나면 두려움이 좀 내려간다. 이제 욕하지 않아도 조금 더 차분하게 나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 시작을 열어준 종민이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