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이 위험한 이유
나는 사람들과의 갈등이 반복되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내 잘못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언제나 참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친한 선생님들을 만나면 내가 겪은 억울한 일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나이가 들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관계는 여전히 어렵고 일정한 간격으로 갈등도 있었다.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장거리에 있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었다. 50km 되는 거리였다. 매일 장거리를 운전하다 보면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문뜩 나에게 반복된 세 번의 경험이 떠올랐다. 000하고의 갈등, 관리자하고의 불편함, 학부모에 대한 두려움이다. 환경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같다. 나는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학교가 달라지고 사람들도 달라졌는데 내가 겪는 어려움과 갈등은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삶에서는 결정적 순간이 있는 것 같다. 답을 찾지도 않았는데 질문만으로 뭔가가 내가 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을 것 같지만 나는 정말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늘 참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착하다는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내가 착하기 때문에 원인은 상대 때문일 거라 단정하게 된다. 갈등의 원인이 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원인을 외부에 두었을 때 나에게 어떤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내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착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면 더 큰일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자부심이 뿜뿜 했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착해야 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않으려 했지만 태도에서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 말에는 눈에 띄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욕구를 드러내지 말자. 상대에게 맞춰서 행동하고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지적능력이 경계선에 있었던 아빠와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는 삼촌과 함께 살았다. 집성촌인 작은 시골마을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은 모두 친척이었다. 멀어도 8 촌간이었다. 어른들은 안타까움에 아빠를 잘 챙겨라는 말을 그냥 인사처럼 했다. 오늘 별일 없지, 밥은 먹었어? 그런 일상적인 말들도 있었을 텐데 별로 기억남아 있지 않다.
나에게는 다 압박하는 말 같이 느껴졌다. 별일 있어요. 밥도 못 먹었어요..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아빠를 잘 챙기라는 말 좀 하지 마세요. 제가 이제 초등학생인데 누굴 챙기겠어요...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네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차라리 얼른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 대화를 빨리 끝내는 게 최선이었다.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아이들은 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아이들은 울지 않는다.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어렵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뭘 느끼는지 찾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마음공부의 영역은 끝이 없는 듯하다. 지금까지는 마음을 말에 담는 연습을 했다. 갈등이 생기지 않길 바라서이다. 오해받지 않고 나의 본심이 마음에 담기길 바랐다.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본심을 듣는 연습도 했다.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말을 듣는 연습은 나의 선입견과 단정에서 벗어나 실제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다. 이 또한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연습을 거듭했다.
어린아이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평온한 일상이란 없다. 적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야 하고, 먹을 게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신경이 곧 두서 있다. 나에게 어른 여자는 적이었다. 늘 나에게 과한 요구를 하고 나를 단정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피하거나 잘 보여 인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 심지어 지금의 나는 그 여자어른의 나이가 되었다. 애착장애의 대가 보울비는 어릴 때 감정은 생존을 위해 뇌간에서 작동이 된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불안의 강도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생명유지 기능을 담당한 뇌간에 기억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순응하며 착하게 사는 길 만이 살길이었다. 그런 습관이 선생님이 되었다고 나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인정이 더 중요해졌다. 첫째를 임신하고 열이 39도까지 간 것이 7번이었다. 늦은 나이 탓도 있고 햇볕이 안 드는 교실에서 겨울을 나면서 감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병가를 하루도 쓰지 않았다. 아파서 쉬겠다는 말을 듣고 나를 따뜻하게 이해해 줄 관리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고 이해해 주는 어른을 상(이미지)이 나에게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아이가 괜찮냐고 묻기만 했다.
몇 년이 지나고 마음공부를 하면서 이런 나의 행동에 가슴이 아팠다. 절대 다시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착하고 순응하는 것이 나의 삶을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지켜야 하는 것도 나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책임이다. 마냥 참는 것은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착하다는 말보다 중요한 것이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해도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