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제나 Jan 03. 2021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처음 애거서 크리스티를 집어든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라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어보고 싶었을 뿐. 추리/미스터리 영역을 밟으면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시작으로 나는 크리스티의 작품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리스티는 나의 루틴을 크게 바꾸어버렸다. 작가를 편애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 나는 그녀의 소설 한 권을 읽지 않고서는 다른 소설을 집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 어떤가. 원래 소설에서 ‘재미’라는 것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크리스티 덕분에 나의 지갑은 점점 얇아지지만 배고픈 덕후가 되면 그만이다.


 추리/미스터리 영역의 특성상 스포일러는 절대 금지여야 한다. 허나 크리스티의 작품을 분석하고 그 감동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니 다소의 스포는 양해해주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묘미를 온전히 맛보고 싶다면 이 장편소설을 읽고 오길 추천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크게 두 명의 탐정이 등장한다. 푸아로와 마플 양.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이 유능한 탐정들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는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병정 섬에는 아무나 초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푸아로와 마플 양은 병정 섬에 초대받기에는 너무나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깨어서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 심판의 날이 왔도다.” -p26

 

 10명의 손님들이 소문 무성한 병정 섬의 저택에 초대된다. 그들의 첫 저녁 식사 시간, 초대 손님들은 누구도 저택의 소유주인 오웬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의 과거를 폭로하는 목소리와 함께 재판이 시작된다. 하나씩 늘어나는 시체와 그에 맞춰 사라지는 병정 인형. 거센 폭풍우와 높은 파도에 갇힌 채 병정 섬에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병정에 관한 동시이다. 저택의 방방마다 걸려 있는 이 동시는 10명의 병정들이 일련의 일을 겪으며 하나씩 사라진다. 병정 섬에는 그 동시와 꼭 맞는 상황의 일이 벌어지고 그에 맞춰 손님들이 운명을 달리 한다.


 벽난로 선반을 지나면서 그녀는 액자 속의 동시를 올려다보았다.

 열 꼬마 병정이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었네. 그리고 아홉이 남았네.

 그녀는 생각했다.

 ‘소름 끼쳐. 오늘 밤 벌어진 일과 똑같잖아…….’ -p102


  고립된 병정 섬에서 저택 외의 사람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외면하고 싶던 현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 중 누군가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이 살인사건은 철저한 계획 아래 있는 것이 자명했다. 그들에게 전해진 편지와 LP, 준비된 병정 인형까지.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린 누가 범인인지, 다음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살해될지 몰라 그들과 같은 긴장감과 두려움을 공유하게 된다.


 크리스티는 등장인물의 감정과 생각을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어쩌면 그녀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우리에게 동기화시키며 객관적인 판단을 잃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주위 모든 사람에 대한 의심, 다음엔 내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공포에 떠는 손님들 속에 살인자의 음성을 흘려 넣으면서도 그녀는 우리가 살인마를 특정해낼 수 없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에필로그에 적힌 범인의 편지를 보면 그의 자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그녀의 자신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며 범인을 유추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처음 이 소설을 완독한다면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사건의 비밀이 후반부의 편지 한 장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사건의 동기와 지금까지의 전개를 결말부의 몇 페이지로 완전히 납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심정적으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마지막의 페이지를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때에 진가가 드러난다. 일부러 다시 보려 하지 않아도 끝 문장을 보자마자 다시 읽게 된다. 두 번째로 볼 때에는 크리스티가 심어놓은 암시가 선명해진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놓치지 않았음에도 흐리게만 보였던 범인의 행적이 윤곽을 나타낸다. 다시 완독을 하면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오히려 크리스티가 범인을 알려주듯이 너무나 많은 정보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범행동기부터 범인 예측, 심지어 속임수 예고까지!


 그의 살인 계획은 성공하였고 경찰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범인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관종이 아니어서 편지를 쓰지 않았거나, 고기잡이배의 선장이 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린 범인을 모른 채로 책을 덮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선 그는 나이가 많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재판을 주재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1년에 여러 달 동안을 전능한 신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겁니다. 그런 경험은 사람의 뇌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죠. 자기 자신을 생사의 권한을 쥐고 있는 전능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머리가 이상해졌을 수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심판자이자 집행자가 되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p187~188


 병정 섬에 초대된 손님들은 법으로 처단하기 힘든 죄를 지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특히 살인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LP는 그 죄를 명확히 한다. 초대된 이들은 범법자가 아니다. 그들이 피해자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제공했을지 모르나,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법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범인이 살인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방식으로 이들을 단죄한다.


 병정 섬 살인사건은 해당 피해자들을 위한 통쾌한 복수극은 아니다. 이 사건은 한 미치광이의 살인을 위한 살인일 뿐이다. 이 살인사건을 계획한 동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말하는 단죄는 살인사건을 위한 구실일 뿐 동기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직접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욕망과 다름없을 터! 나는 범죄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직업적 요구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 내 상상력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섭게 자라나고 있었다. -p314


 범인은 모순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낭만적 상상력, 죽음에 대한 가학적 쾌감, 그리고 정의감. 그의 모순적 성격에서 그의 예술 작품이 병정 섬에서 탄생했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뿌듯하게 그 작품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는 거듭 자신의 강한 정의감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살인이라는 이름의 재판을 진행하는 그에게 투철한 정의감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의 살인은 그저 살인충동으로 희생양을 찾은 결과물이었을 뿐이다. 모든 살인사건은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그의 주관적 해석으로 인한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다. 이 모든 내용을 바다에 띄우고 뿌듯하게 잠들었을 범인을 생각하면 이 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계속 범인을 추측하게 된다. 크리스티 소설은 특히 범인을 예측하기 힘든데, 다시 읽어보면 또 그녀가 제시한 사람 밖에 범인이 될 수 없으니 분할 따름이다. 지루하지 않고 속도감 있게 작품을 이어나가는 간결한 문장과 전달력. 여기저기 깔아놓은 암시와 그것을 감추는 용의자들의 의심과 대화까지. 크리스티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끝없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또 다른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또한 매우 흥미로우니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나는 오늘도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을 주문했다. 점점 늘어가는 책장 속 그녀의 공간을 바라보면 너무나 뿌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컨피던스 맨의 직업윤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