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아몬드』
서점 매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나는 바로 결제를 해버렸다. 아몬드 껍질 같은 갈색 옷을 입은 소년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얼핏 증명사진 같아 보이는 이 표지는 증명사진이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대부분 우리의 증명사진은 웃는 표정이지만, 소년은 그야말로 무(無)표정이기 때문이다. 이 표지의 소년이 바로 『아몬드』의 주인공 석윤재다.
윤재는 머릿속의 아몬드에 고장이 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물리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느끼기는 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거나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 그는 엄마의 등쌀에 그런 감정을 학습하지만 윤재에게는 수학공식처럼 알지도 못한 채 외워야 하는 숙제 같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불행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차례로 비극이 덮쳐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의 생일인 크리스마스이브, 엄마와 할머니가 눈앞에서 살해 당한 사건이다. 크리스마스에 즐겁게 웃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할머니는 죽었고 엄마는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게 되었다. 누구나 트라우마가 생길 법한 사건이지만, 윤재는 악질 섞인 ‘기분이 어땠냐’는 반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윤재에게 곤이가 나타난다. 자신의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곤이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함께 성장하는 친구가 되어간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시작은 곤이가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곤이로 인해 스스로 감정에 다가가기 시작하는 윤재의 성장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곤이는 윤재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동급생이다. 윤재는 헌책방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살지만 “예쁜 괴물”이라 불리며 엄마와 할머니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반대로, 곤이는 좋은 집, 좋은 직장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살지만 어렸을 때 실종당해 이리저리 떠돌며 제대로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갈등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윤재는 감정이 풍부한 곤이를 보며 그와 이야기해 보고 싶다 느끼고 이상하게 곤이도 자꾸 그의 헌책방을 찾아온다.
처음 윤재를 마주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의 끝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이런 시련을 계속 겪는다면 소년이 감정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어림짐작 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윤재가 다른 사람들처럼 풍부한 공감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웬만한 설득력이 아니고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윤재의 병명은 명확했고 그것이 선천적이었으며, 보통의 사람들이 겪지 않는 큰 비극에서도 그는 불행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의 성장은 뚜렷했다. 엇나가는 곤이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도라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느끼고, 병상에서 눈을 뜬 엄마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집을 나간 곤이를 찾아나서며 ‘친구’라고 말한다.
그의 성장이 ‘키가 크는 것처럼 마음이 자라는 것’이라는 심박사의 의견에는 크게 공감하기 어렵다. 윤재의 감정이 그저 신체와 함께 자란다는 것은 납득하기도 힘들고 재미도 없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윤재의 성장은 아몬드가 불어나는 것이 아닌 아몬드가 불어나는 상상을 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은 의학에서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와는 맥락을 달리 한다. 플라시보 효과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병세가 호전되지만 윤재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믿음이란 것이 전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p159)
윤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윤재가 느낄 수 있는 폭을 스스로 넓혔기 때문이다. 윤재는 아몬드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식탁에 올라오는 아몬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맛있게 먹는 방법을 터득했다. 입안에서 아몬드를 굴리며 뾰족한 곳에 찔리고 아몬드의 결을 온전히 느끼는 과정, 그리고 아몬드가 럭비공처럼 불어나는 상상.
윤재는 어떤 문제든 온전히 느끼고 부딪힌다. 그가 좋은 점수를 받는 수학이나 과학보다 낮은 국어 점수에 더 신경 쓰고, 책에 관심을 느끼며 언제가 글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그 문제에서 눈 돌리지 않고 부딪혔기 때문이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245)
이제 그는 할머니가 왜 자신에게 가라고 소리쳤는지 안다. 싫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아픔을 겪는 것이 윤재가 아니라 할머니 자신이라 다행이었을 거라 짐작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완벽하게 사람들에게 녹아나는 공감을 보이지는 못하지만 그는 할머니에게 눈 돌리지 않고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할머니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소설 자체가 언젠가 윤재가 말한 자신을 표현한 글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그는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충분히 글로 자신을 이해시켰다. 윤재의 자그마한 아몬드로 만들어낸 세계가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