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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제나 Jan 07. 2021

이제부터 네가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할로윈에 읽으려고 아껴뒀던 책이 있었다. 『프랑켄슈타인』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왠지 그날은 고전적인 공포소설을 보며 그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근데 왜 막상 할로윈이 되면 다른 책이 읽고 싶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결국 할로윈이 지나고 새해가 밝아버렸다. 나는 다음 할로윈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싶다는 유혹에 휩싸였고, 지금은 이 소설의 서평을 쓰고 있다. 한편으론 할로윈에 읽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까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초록괴물이었다. 머리에 나사못도 박혀있고 피부를 이어붙인 자국도 있는 괴물.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닌, 그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이름이다. 영화나 연극을 통해 이러저러한 각색이 이루어지며 창조물은 창조주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었다. 아마 흉측한 창조물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덮어쓰게 된 것에는 그가 이름이 없었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이 세상은 내게 어떻게든 밝혀내고 싶은 비밀이었기 때문이오. 호기심, 숨겨진 자연법칙을 알아내기 위한 진지한 연구, 그리고 끝내 내 앞에 펼쳐진 진리를 마주했을 때의 황홀감에 가까운 기쁨,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 최초의 감각이라 하겠소.     


 흔히 우리에게 소비되는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하여금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어릴 때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과학자들은 대개 지구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미친 과학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욕망은 현대의 미친 과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루하다.


 그는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는다. 하지만 그는 왜 그 기술을 완성시키려 하는가. 왜 생명을 창조하려 하는가. 거창한 이유라도 있으면 좋겠다만 아무리 책을 뒤적여도 그 동기에는 호기심이나 성취감 같은 단어 밖에 붙여줄 수 없을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책임감이 현저히 부족하다. 그는 자신이 불어넣은 생명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욕구 밖에 없었고, 그 책임감 없는 태도는 비극을 야기했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은 외관이 끔찍했다. 흉측한 얼굴과 작업의 편리성을 위해 거대하게 만들어진 몸, 사람 하나는 거뜬히 죽일 수 있는 힘.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만다.


 당신이 아무 잘못도 없는 저를 기쁨에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환희로 가득한 이 세상 곳곳을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제가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저는 선하고 따뜻한 존재였으나, 절망으로 인해 악마가 되었습니다. 저를 다시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창조물은 세상을 전전하며 고독을 느낀다. 어떤 누구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는 멀리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과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족으로 인해 자신이 그 세계에 영원히 편입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는 분노와 절망을 쏟아내며 자신과 닮은,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성 생명체를 만들어 달라 프랑켄슈타인에게 요청한다.


 나 또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책임감 없고 인간 중심주의에 찌든 인간이어서 그런걸까. 한동안 그는 왜 꼭 성이 다른 여성을 고집하는가를 고민했다. 모두가 갖는 아내를 가지고 싶다 했지만 그가 번식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이 세상의 고독을 혼자 다 맛보았던 창조물이니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생명체를 늘려나가고 싶어 하지않을까. 그저 둘이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의 절절한 호소에도 의심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는 가볍게 목을 움켜쥐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생물이었고, 그가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짐작한다면 창조주의 입장에서 쉬이 그녀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그를 배척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그녀를 만들어주겠다고 그에게 약속한다. 그가 조금 더 생각하는 인간이었다면, 혹은 창조물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희망을 던져주지는 말았어야 했다.

 창조물에게 인간을 파괴하려는 욕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고독한 생명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고된 여행길을 모두 따라다닌 그의 분노를 십분 이해하는 바다. 작업대에 찢어발겨진 그녀의 살덩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서 내게 복수하기만 벼르고 있었다면, 저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텐데.     


 프랑켄슈타인의 시신 앞에서 그는 이렇게 힘없이 말한다.

 복수심에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추적하는 창조주. 창조물은 그와 멀어졌다 싶으면 속도를 늦추고, 힘들어보이면 먹이를 가져다놓으며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따라 오고 있는지 살핀다.

 따뜻한 가족을 가질 수 없는 괴물에게 프랑켄슈타인의 증오는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차악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복수심은 그를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차악이 사라지자 자신의 몸뚱아리를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음에 이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살았다는 흔적을 지운다. 똑같은 존재를 또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프랑켄슈타인은 다방면으로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하지만 나는 텍스트나 캐릭터로 받아들이기 보다 이 가여운 괴물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껏 다른 사람을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허구의 캐릭터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이 선한 괴물에 한해서는 어쩐지 그런 마음을 품어도 괜찮을 것만 같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배척받았던 그가 동정이나 연민이 주는 달콤함을 간절히 바랐을 지도 모르니까.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필요도 없었던 이름. 창조주조차 자신에게 지어주지 않았던 이름. 사람들은 이제 그를 ‘프랑켄슈타인’으로 기억한다. 대대로 이어지는 성씨처럼 이 창조물도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증여받았다. 창조주 프랑켄슈타인보다 창조물 프랑켄슈타인이 따뜻하고 정감 넘치던 이 가문에 더 어울린다.     


p.s 내가 읽은 판본은 아니지만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프랑켄슈타인 스위트 패키지는 이 괴물에 대한 섬세하고 따뜻한 관심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에게 표지로나마 여자친구를 선물해주는 기획이라니. 뭐 이렇게 스윗해!



사진출처 : 황금가지 출판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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