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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아 Aug 29. 2024

[공정여행]_수원화성

20240828

8월 28일 수원화성에 방문했다.

집에서 30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몇 번이고 간 적 있었지만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라 괜한 긴장이 들었다. 많이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싶다면서 왜 이곳에 왔느냐 물을 수도 있겠다. 이는 내가 공정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감상과 연결된다. 왕복 2-3시간 이상의 거리가 있는 지역들을 다니고 이에 대해 감상하다 보니 정작 내게 가장 익숙한 여행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어린 시절부터 드나들며 좋은 추억을 쌓았던 수원화성과도 나의 감상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했다. 수원시민임에도 지역 문화유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또한 한몫했다. 이전 여행에서 달라진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자료조사만으로도 대강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선 두 글을 작성할 때에는 두루뭉술한 공정성만을 가지고 흘러가는 대로 말을 쏟았다면 이제는 설명과 감상을 미리 구상할 수 있었다. 나는 수원화성이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흥미로운 사실이 많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여행기를 풀기 전 사전지식 몇 개만 정리하겠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착공시킨 계획도시인데 지도만 봤을 때 눈에 띄는 것은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으로 총 4개의 문이다. 또 도시를 가로지르는 물길이 존재하는데 이 물길은 북수문에서 남수문을 지난다.수원화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사도세자와 정약용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수원화성이 건설된 배경과 연결된다. 수원화성을 지은 큰 목적 중 하나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묫자리를 이장하기 위해서란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을 시켜 거중기를 만들도록 해 완공 시간을 단축했고, 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여러 차례 파괴되어 지금은 보수한 모습이다. 그런데 복원에 있어서도 예사를 뛰어넘었다면 믿겠는가? 지금의 수원화성이 원형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도 과거의 기록물 덕분인데 그림과 글이 들어간 설계도인 화성성역의궤가 바로 그것이다. 원래라면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에도 어려웠을 것이지만 워낙에 정확한 설명 덕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여 이례적임에도 불구 등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서남암문을 지날 때만 해도 기와가 떨어져 안전 펜스를 쳐 둔 것을 봤는데, 더 이상 파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원화성 한바퀴 지도. 나의 경로는  1-2-3-4

이번 여행에서 거치게 될 문은 창룡문을 제외한 3개의 문으로,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장안문까지 수원화성의 성곽을 따라 반 바퀴를 돌 예정이다. 팔달문 옆에는 수원남문시장이 있는데 이곳은 마지막에 방문하기로 했다.

도착하면 보이는 것은 ‘팔달문’ 하면 생각날 원형의 교차로였다. 버스는 이 길을 한 바퀴 빙 돌아 내려주었다. 사진으로 볼 때와 달리 실물을 제법 커서 올라갔을 때 꽤나 높게 느껴진다.

뒤쪽으로는 일반음식점이나 옷가게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지역 상권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팔달문뿐만 아니라 앞으로 관광할 수원화성 안팎으로 넓게 형성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4개의 문에는 각각의 고유한 깃발이 있는데 저마다 색이 달라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팔달문은 붉은색이었다. 깃의 의미는 올 때마다 까먹어서 매번 다시 찾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앞으로 마주할 2개의 문이 남았으니 일단 제쳐두고 차차 생각해 보기로 했다.


팔달문을 오른쪽으로 두고 로데오거리 위쪽의 계단을 오르면 남포루가 보인다. 말 그대로 포루라서 밖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다. 포는 없었다. 다시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가면 서남암문이 보인다. 서남암문도 말 그대로 암문이다. 적이 알지 못하게 드나드는 문인데 그래서인지 조금 낮아 보였다. 암문 뒤로 보이는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서남각루가 홀로 위치해 있었다. 한자는 3글자로 서남각루의 다른 이름이 화양루인 모양이었다. 신을 벗으면 올라갈 수 있어 몇몇 사람들이 그늘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곳의 원래 용도도 휴식처였다. 왔던 길로 나오면 맞은편에 독립기념탑이 보인다. 왜 이곳에 독립기념탑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역사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왜인지 신기했다. 주변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어 더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수원화성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길이 한 갈래뿐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길치는 어디를 가든 몇 번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칫하면 여행에 집중하기 힘들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성벽만 따라 쭉 걸으면 되니 든든했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면 점점 건물이 낮아지고 하늘이 넓어진다. 서포루를 지날 때에는 그냥 동네 산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날이 맑아서 풀도 밝고 그림자도 적어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이 펼쳐진 것을 보자니 나중에는 이런 들판이나 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친환경 건축물이라 하면 네모나고 눈 아프도록 하얀 건축물에 꽃이나 나무 몇 종류 조경한 게 다인데 그런 이질적인 디자인보다 훨씬 감명 깊고 예뻤다.


서포루 맞은편에는 효원의 종이 있다. 1타는 부모의 건강, 2타는 가족의 건강, 3타는 자기 계발이란다. 과거에 한 번 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울림이 커서 잘못 맞으면 죽겠다는 두려움이 들었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서장대가 보인다. 아마 이곳이 제일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해를 피해 들어와 있었다. 옆에는 서노대가 있다. 서는 서쪽이겠고 노가 뭔지 몰라 검색해 보니 기계식 활이라고 했다.

이 노를 높게 쏘기 위해 지었다 설명되어 있었는데 옛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궁금해졌다. 이어 서포루를 지나 서북각루가 보이니 옆에 화서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서문이 창룡문과 닮았다고 들었는데 딱 수원화성 하면 떠오르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문 앞에 뚫린 반원 모양의 성벽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안쪽으로 적군이 들어오면 포위해서 공격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이를 유추하는 재미가 있었다. 성벽에 난 구멍의 용도나 중간중간 있는 포루를 보며 한창 상상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 알고 봐도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화서문 위를 지나면 너무 높아서 이 벽을 어떻게 하나하나 올렸을까 경외심이 들었다. 여기서는 정말 다양한 인종의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는데 이들은 유난히 화서문에 많은 것 같다.


화서문 뒤쪽으로는 서북공심돈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설계도로만 봤었다. 안쪽은 빈 채로 둥글게 올라가는 계단을 상상할 수 있었다. 높아서 적의 동태를 보는 용도 같았다. 장안문으로 출발하려다가 깃발 색을 보는 것을 잊어서 다시 돌아왔다. 화서문의 색은 하얀색이었다. 장안문은 바로 앞에 있었다. 깃발 색은 검정이었고 이어서 색깔로 동서남북 방향을 표시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초등학교 때 죽어라 외웠는데 다 부질없었다. 아무튼 깃발은 문뿐만 아니라 걸어오는 내내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다 방향을 표시하기 위했던 것일까 궁금해졌다. 하긴 둥근 성 안에 있으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를 것도 같았다. 장안문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앉아 몇십 분을 있었다. 사람도 없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그늘 덕에 어두워 동굴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천장을 보고 싶었는데 벽재가 떨어질까 봐 그물을 쳐 두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문화재 보존을 생각하면 조금 슬펐다. 문화재를 방문할 때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문화재들이 보는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의 전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원화성이 완공된 후 처음으로 이곳을 보는 정조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궁금했다.

나라면 굉장히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지은 것이 아닌데도 괜한 자부심이 드는데 본인은 어땠을까.

팔달문에서부터 장안문까지의 긴긴 걷기를 마치고 성 안쪽으로 내려와 밥을 먹을 곳을 찾아다녔다. 원래 이곳에 있던 일반 가옥들은 거의 보수공사를 한 모양새였다. 옛 건물 본연의 감성을 살려 페인트를 덧대 느낌 있는 카페들도 많이 들어왔다.

골목을 지나다 보면 종종 나타나는 폐건물

어쩔 수 없지만 골목 사이사이에는 쪽방촌이 연상되는 방치된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사람이 지나지 않는 벽에는 세월이 남긴 검은 때가 있어 문화거리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수원화성 자체에 청룡버스나 관람코스, 문화관 같은 관광코스가 발달했기 때문에 내부의 건물들 또한 관광화가 많이 진행되어 여러 한복풍 소품 또는 외국의 유명한 버거, 파스타 등의 체인점도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게 아직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방치된 건물이나 실제 주민이 사는 집과 대비되게 보여 확실한 구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역 주민들은 매일 사람들이 몰리는 이 거리에서 불편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는데 실제로 가정집 옆을 지나면 말소리나 tv 소리 심지어는 빨래 너는 소리까지 들려 더욱 그랬다.

종종 문화재 훼손에 대한 뉴스를 접할 수 있다. 경복궁에 있었던 낙서 테러나 숭례문 방화와 같은 사건들이 기억에 남는다. 수원화성을 걸으며 이를 보존해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문화재는 동시에 과거의 문화와 양식의 산물이기도 하므로 과거 조상들의 재산과 같은 느낌인 것 같았다. 정조가 안전한 도시를 바라며 수원화성을 계획한 것을 알 수 있듯 현재의 우리는 문화재를 통해 과거의 우리 조상과 이어져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던 문화재 테러나 노르트담 대성당의 화재 등 문화재가 피해를 받는 사고들은 사라져 가는 과거의 흔적들을 더욱 빠르게 집어삼키는 것 같아 안타깝고 아쉬웠다. 문화재를 평생토록 보존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대로 사라지도록 두기에는 아깝고 대단스러운 것들이기에 더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비를 보면서도 생각했던 건데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생가가 그냥 방치되고 있다는 게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이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낙후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했지만 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전혀 아니다. 앞으로 사라져 가는 문화재나 보존 가치가 있는 유산들에 더 관심을 주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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