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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Jul 09. 2024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지난 일요일 미사에는 신부님을 보좌하는 복사아이들에게 눈이 갔다. 초등학교 아이들인데 참으로 예뻤다. 미사 중에 미소가 가득한 모습으로 복사가 즐거운 듯, 흥이 느껴지고 보는 나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복사아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무의식이 미소를 띠게 한 듯했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참 열심히 했던 그때의 기억은 미소 짓게도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진 내 사고를 만든 원인의 한 축이었기에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내 나이 7살, 집에서 성당까지의 거리는 약 6km, 매주일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갔다. 주일뿐만 아니다 주중에 할머니가 성당에 가실 때에도 같이 갔다. 스스로 판단을 못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매주 4번을 할머니와 12km를 걸어서 왕래하는 것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아무런 불만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연함은 발걸음조차 가벼이 느끼게 하였고 할머니와 걸어갔다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게 하였다. 시간은 흘러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할머니와의 성당 왕래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성당에서 복사를 하게 되었고, 할머니와 걷던 길을 나 홀로 왕래하였다. 혼자서 가는 길이 지루하거나 따분했을 터인데 복사의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복사의 의미 때문인지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하는 마음으로 방과 후에도 곧바로 6km 떨어진 성당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루의 일과는 학교로 시작하여 성당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가던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서의 생활은 일과가 되었고, 성당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나 신, 이를 보좌하는 복사로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어도, 천주교 교리를 익혔고 교리 대로 살아가도록 정신으로 습득하였다. 모든 행위의 기준은 교리가 되었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교리를 기준으로 일치가 되어야 함을 받아들였다. 모든 일정을 성당 생활에 우선을 두어 맞추었고 심지어 친구들과의 놀이도 성당의 테두리 안에서 했다. 영락없는 성당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을 지을 때부터 참여하였고 벽돌 나르기를 하면서 하루하루 성당이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신축 건물이 올라가는 현장으로 향했고 그 시간은 충분히 즐거웠다. 어린 마음에도 성당 모습이 갖추어지는 것에는 나의 기여가 크다는 생각을 했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간이 건물에서 주중, 주일 미사가 진행이 되었고 복사를 하면서 성경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이렇게 하루의 일과는 여전히 학교에서 시작하여 성당에서 끝이 났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가까운 성당을 벗어나지 못했고, 성당이 완성된 이후에는 집은 학생, 청년, 장년의 사랑방이 되었다. 이렇게 유년, 청소년시기 모두를 성당에 쏟다 보니 자연히 학생모임에서 주어지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빼도 박도 못하는 성당 붙박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교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한쪽에서는 철저하게 나의 사고의 반경을 좁히고  생각의 틀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종교의 뿌리는 3대 위로 올라간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믿음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나에게 이어졌고 나 또한 그냥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고 충실히, 열심히 믿음을 이어 갔다. 가까운 친지들 중에는 신부님, 수녀님도 있었으니 천주교가 삶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남음이 있다. 나도 한때 신부가 되겠다고 준비도 하였으니…


고향집 앞에는 향교가 있었다. 향교의 좌장이 이웃 어른이었으니 고향집에 갈 때면 향교의 법도에 따라 행동했었다. 아침저녁으로 향교 어른을 뵙고 인사를 드렸고, 짧게 혹은 길게 어른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놀 때도 향교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각히 느끼진 못했어도 향교의 보수성은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부산이라는 지역의 보수성도 장남인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가슴의 따뜻함과는 달리 말로 표현을 못하는 부산 아버지의 무뚝뚝한 역할은 그대로 대물림되었고, 장남을 우선하는 뿌리 없는 선호는 장남의 역할에, 장남의 어깨에 과할 정도의 무게와 책임을 실었다. 어떤 면에선 그러한 보수적인 무게와 책임이 날 애어른으로 만든 것이라 여겨진다. 아버지와 교감을 못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특히 장남에게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무모한 투자를 하였고, 자식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에 어긋나지 않게 질풍노도라 불리는 청소년시기조차도 일탈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스스로를 틀 안에서만 살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이렇듯, 여러 영향으로 굳어진 건조하고 딱딱한 성향은 계속하여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고, 스스로 속박하여 생각, 말, 행동에 제약을 걸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과는 공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할 정도의 모순 덩이가 되어 있었다.


반백이 훨씬 넘고, 오랜 해외 생활의 경험이 많은 지금도 몸에 배어 있는 딱딱함이 나아지질 않았다. 공감에 힘들어하고 감정이입을 어려워하면서도 내 모순을 버리질 못한다. 마음의 넉넉함, 생각의 여유로움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반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아내의 마음조차도 토닥거려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하겠다고 말하고서도 그다지 공감이 안 되고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어쩌면 말과 행동까지도 일치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모든 어려움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가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내게 주어진 역할, 책임, 부담에 도달하게 된다. 뚜렷이 체감하지도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버린 가장 보수적인 환경의 조합으로 애어른이 되었고, 그렇게 굳어진 생각의 틀은 나를 계속해서 속박했고 쉬이 벗어나질 못했다. 도덕의 속박, 종교의 속박, 역할의 속박, 기대의 속박, 책임의 속박에서 발버둥을 치며 자유롭고자 했으나 여전히 그 속박 속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난 일요일 성당에서 만난 그 해맑은 복사들의 미소 이면에서 속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의 맑은 미소는 복사 때의 기억을 불러와 잠시 행복했으나, 그 아이들과는 달리 내게 있던 속박의 기억은 가슴을 무겁게 눌렀던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속박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력을 하지만 상당 부분, 그 속박의 틀에 걸쳐 있다. 그냥 편해야 한다. 모든 것을 편하게 하려는 마음을 더 키워야 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를 에워 쌓던 모든 속박들을 인지하고 내가 통제하려 한다. 받아들일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려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은 돌려주려 한다. 종교에서, 도덕에서도 편하게 하려 한다. 질 수 없는 책임을 내려놓으려 한다. 강제로 주는 역할을 안 하려 한다. 아이답게 다시 자라 보려 한다. 


그리고 지금은 내 마음을 다스려 편안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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