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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Jul 16. 2024

삶에서 계산서를 받을까?
영수증을 받을까?

매일 아침 진행되는 독서 모임에서 좌장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묵직하게 전달되는 바가 있어서 여기에 공유하고자 한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는 모든 것, 가령 행복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이 모든 것에는 총량이 있다. 양이 쌓이면, 나중에 그 양이 작을 수 있지만, 그 총량을 못 채우면 반드시 나중에 뭔가 온다. 그리고 지금 고통이 심하면 총량을 채우라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고통이 심하다고 해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총량이 줄어드는 셈이 된다. 반면, 지금 고통을 피하면 나중에 복리로 고통의 총량에 대한 계산서가 오고, 고통의 총량을 채우면 그에 상응하는 영수증이 온다는 것이다. 행복도 같은 맥락에서 얘기를 한다. 


좌장의 얘기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충분히 묵직하다.   


다소 무거운 예를 들어 얘기하면, 삶의 고통으로 어려움에 빠진 엄마가 자신의 고통도 감내하지 못해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돌볼 의지조차 없어 방치하게 될 때, 그 아이에게는 큰 위험이 닥치거나 그렇게 방치된 상태로의 정신세계에서 자라게 된다. 결국 아이는 다쳐 생활에 불편을 겪거나, 잘못 자라서 폐인이 되기도 한다. 엄마가 고통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아, 여러 가지 상황에서 두렵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회피하는 성향이 짙다면, 그 고통이 자식에게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엄마가 치러내지 못한 고통이라는 계산서가 다른 곳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총량을 채우지 못하니, 그 남은 고통은 계산서가 되어 자식에게 내려가고, 자식이 엄마의 몫까지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얘기한다. 어려움은 맞서야 하고, 두려움은 이겨내야 하고, 고통은 인내해야 한다고.. 하나, 현실에서는 내가 편해지려고, 내가 감당이 안되어, 이것들을 피하려는 의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피하려 하면 그것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나 자신, 혹은 내 주변의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그 답은 간단하게 드러난다. 


위의 어려움을 겪는 엄마와 방치된 아이 얘기처럼, 내가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려 하면, 그 값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넘겨지고 그 사람은 인연, 관계라는 이유로 어려움과 고통을 떠 안아 유사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려움과 고통이 대를 이어, 오히려 증폭되어 간다.


지금 공부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책을 덮고 공부를 포기하는 순간, 그 회피는 총량을 채우지 못한 채 고스란히 다음으로 넘어가게 된다. 배워야 할 시기에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자라서는 경제활동에서 밀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들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생활은 배움의 고통보다 더 힘들게 된다. 이 고통마저도 견디지 못해, 쉬운 것을 택하게 되니 고통의 총량은 그대로 남은 채 계산서만 받게 된다. 혼자인 경우, 빚만 남긴 채 사라지게 되고, 가족이 있는 경우는 고스란히 가족에게 그 고통의 계산서가 넘겨지게 된다. 실상에서 혹은 드라마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은지? 고통 회피와 안이함이 초래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은 왜 그토록 ‘고통은 인내하고, 어려움은 맞서라’고 강조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근데, 나는 과연 잘하고 있나? 나는 고통을 감내하고 어려움에 맞서고 있나? 총량을 채워가면서 계산서 대신 영수증을 받고 있나? 그 대답을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이다. 지금도 ‘해야 할 것’에 대해 ‘하기 싫은 감정’이 앞선다. 성취했을 때의 쾌감은 하기 싫을 때의 감정과는 비교가 안되는 정도임을 알면서도 하기 싫음에 떠밀려 성취를 뒤로 미루고 있다. 35년 해외비즈니스 경험을 출간하고자 목표를 세웠고 일정까지 정했음에도 바쁜 일정을 핑계로 미루고 있다. 사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미루는 이유인 듯하다. 출간의 과정을 고통으로 묘사한다면 나는 지금 고통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지혜를 나는 놓치고 있는 듯하다. ‘해야 할 일을 안 했을 때 느끼는 고통을 생각하면, 할 일을 하게 된다.’ 즉,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한 뒤 나중에 스스로가 겪게 될 좌절감과 같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알게 되어 할일을 하게 된다는 평범한 지혜를 놓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을 당겨서 쓴다고 했다.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미루기보다는 먼저 사용하여 총량을 채우려는 지혜는 모든 것을 플러스 요인으로 받아들여 당장 지금 무엇을 하게 만든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은 내게 주어진 총량을 채우는 것이라는 긍정의 생각을 갖고, 바람이 불어도 버티고, 태양이 내리쬐어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다음으로 자신이 당해야 할 일을 자진해서 당하려 할 것이다. (주 1)

     

하루의 해야 할 일을 루틴으로 간주하고 중독처럼 해야 할 듯하다. 하루의 총량이 곧 한 달의 총량이고, 일 년의 총량이며, 그리고 일생의 총량이니 매일매일 채우고, 나에게 발부된 계산서를 정산하고 영수증을 받아야 할 듯하다. 독서모임 좌장은 얘기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이라는 하루를, 태양의 빛을, 새소리를, 책 속의 성현들의 말씀까지 거저 받게 되었으니 빚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그리고 하루의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하여 일과를 마무리하는 밤에는 계산서를 정산하고 영수증을 받아 (그 무엇의) 총량을 채워 그렇게 하루를 0(zero)으로 만들고 잠이 들어야 한다고.




나는 세네카의 이 가르침덕에 가끔 해야 할 일을 너무 하기 싫어 미루거나 흥에 겨워 놀기에 빠지기도 하면, 마치 내가 목석이나 가축과 뭐가 다를까 싶을 때가 있다.  


우둔한 본성과 자신에 대한 무지 탓으로 가축과 짐승의 부류로 전락한 자들은 그러한 목석이나 짐승과 같은 무리로 여겨야 한다.

그런 사람과 목석과 짐승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목석과 짐승에는 이성이 전혀 없고,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의 재앙을 부르는 사악하고 일그러진 이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리 밖으로 쫓겨난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행복한 삶이란, 올바르고 확실한 판단 위에 세워진 안정적이고 변치 않는 삶을 말한다. 

그때 정신은 맑고 깨끗해 혹독한 타격을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공격조차 받지 않는 경지에 있기 때문에, 

모든 해악에서 해방되어 만일 운명이 노하여 공격해 온다 해도 한번 들어선 그 경지에 계속 서서 자기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낸다.

실제로 쾌락에 대해서도, 

혹시 그것이 곳곳을 둘러싸고 모든 통로를 침입하여, 

달콤한 속삭임으로 정신을 유혹하면서 온갖 수단으로 우리 인간존재의 전체 또는 일부를 어지럽히려 해도, 

적어도 인간의 흔적을 간직한 자라면, 

그 누가 밤낮으로 쾌락에 빠져 정신은 내던진 채 육체에만 정력을 쏟고 싶어 하겠는가. (주 2)


인생에서 계산서를 받거나, 그 계산서를 후대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선, 지금 내게 주어진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어려움, 고통이 있어도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강인하게 마주하여 해내야 한다. 어떤 이유로 해야 할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시작해야 한다. 시작은 한 번만 하면 되고 시작한 뒤는 머뭇거리지 말고 달려가면 된다.  


습관을 바꾸려면 새로운 습관을 들이면 된다. 인생에서 계산서를 받는 것보다, 영수증을 받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하루의 시작부터 생명에 대해, 공기에 대해, 시간에 대해, 가족에 대해 등등 빚을 지게 되고 이는 내게 던져진 계산서다. 하루를 알차게 살아서, 이 계산서를 영수증으로 다시 받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주 1)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 2010, 나래북

(주 2)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 2017,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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