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의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 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 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쩌겠어요? 그게 아버지 딸인 걸.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에서 -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생각을 하나둘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자니?”
밤 9시가 지나는 시간, 늦은 저녁 무렵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에 겨운 콧노래, 흔들흔들 균형이 무너져 신발장에 부딪히는 소리, 마루에 내딛는 쿵 발소리, 방방이 열어보는 문소리.. 이 번잡한 시간의 주인공은 아버지다. 방에서 책과 씨름하는 나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번잡한 시간에 익숙하기에 이미 거실소파에 자리를 잡고 계셨고 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방에서 나온다. 아버지는 양손에 전기 구이 치킨 두 마리가 든 봉지를 들고 흥겨워서 큰 소리로 다시 얘기한다.
“ 아빠가 치킨 사 왔다. 어서 와서 먹자”
거실 한가운데에는 대나무로 만든 소파와 나무 테이블이 있다. 이 대나무 소파가 있는 거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늦은 저녁에 가족이 모여 앉아 치킨을 먹는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더 좋을 때는,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지만, 가끔씩 거실에 있는 FOREST라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두 손가락으로 치시곤 했는데 곡명은 ‘고향의 봄’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진지했고 마치 마음에 담겨 둔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했다. 아버지의 피아노 치는 모습과 그 소리는 금방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매주 접하는 상황이고 자주 듣는 곡인데 왜 매번 마음이 아릴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기운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고향의 봄’이라는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는 가족들의 얼굴에도 순간 진지함이 나타난다. 아버지에게 언짢게 던지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아버지의 피아노 소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빠져들게 한다. 피아노 선율은 심플하지만 묵직하게 다가와 나의 예민해진 감각도 풀어준다. 이렇게 피아노는 가족이 둘러앉은 거실의 심난한 공기를 정화시키고 다시 동생들의 가벼운 재잘거림으로 이어준다.
그러나 가족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고 피아노 소릴 듣는 과정이 대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 가족들에 던지는 아버지의 단어는 대략 두세 마디였다. 사실, 하루 종일 가족들과 공유하는 대화는 두세 마디가 전부였다. 흔히 얘기하는 경상도 아버지들이 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치킨을 사 들고 오시는 날조차,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세 마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스스로 기분에 취해 콧노래 부르거나 고향의 봄을 연주하면서 아버지의 세계에 빠지는 것 이상의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늘 밖에서 이일 저 일로 바쁘셨고 나이 드신 시점에는 신협을 맡아하셨다. 자식들이 성장하는 시기에도 교감은 전무했고 거의 모든 일과를 밖에서 보내셨다. 주말이나 일찍 귀가하는 날에는 더욱 대화가 없었고 가족 구성원 각자가 할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신 듯하였다. 우리가 아는 그 시대의 아버지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좋아하고 말고도 없었지만, 아버지와 자식 간의 대화 없는 일상은 너무도 편안히 익숙해졌다.
“아들아 사랑한다”
표현은 무뚝뚝해도, 들었어야 했고, 필요한 말이었으나 나는 기대도 안 했고, 아니 아예 생각을 못했고, 아버지 또한 이런 마음의 표현을 어떻게 하는 줄 몰랐거나 왜 해야 하는지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도, 나도 미성숙했던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이런 건조한 관계는 절대 대물림 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지만, 아버지와 똑같이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만 보니 나와 아버지의 밋밋하고 어색한 관계보다 나와 내 아이들과의 관계가 더 건조하였다.
첫째 아이가 해외생활의 외로움으로 힘들어 할때에도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바램만 있었고 아이와 교감을 못했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 뭔지, 부모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아버지라는 언덕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그리고 아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아이와 혈연의 관계는 있었지만 전혀 공감과 교감 없는, 타인만 못한 관계였다.
나는 그저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게, 모자라지 않게 편리를 제공하는 아버지의 의무만 다하는 꼴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얘기한다. “아빠는 공감할 줄 몰라”, “ 아빠는 나와 생각이 너무 달라”. 결국, 내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나와 아이들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가졌던 언짢은 생각, 불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나를 조금 알고부터 깨닫게 되었고 아버지가 느끼셨을 당신에 대한 나의 거리감에 죄송한 마음이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치킨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아버지의 피아노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었다. 어찌 보면 아버지는 한결같았다. 항상 밖에서 생활하고 가족과의 시간이 없음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을 못하니 매번 치킨을 사 오신 것이었다. 말로 표현을 못하니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신 것이었다. 가족과의 공감 능력이 없었고 공감을 못하니 본인의 방식으로 표현을 하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20여 년을 간암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간암 발견 당시 4기였고 60이 넘은 연세였다. 일에서 벗어난 후에도 늘 바쁜 일정을 보내셨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시는 활동이 많았다. 어느 날 어깨와 등 부분의 통증이 심해서 몸살 정도로 알고 병원을 찾았다. 그날, 간의 90%가 암세포가 덮여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가 얘기한 남은 시간은 6개월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간암 투병이 20년으로 이어졌다. 중간에 다른 장기에 전이되어 큰 수술도 3번이나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오랜 기간을 버티셨을까? 의사는 기적에 가깝다고 얘기를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항암 치료 포함하여 투병 중에도 늘 밖으로 다니셨다. 집에서 가만히 있는 대신에 밖에서 할 일들을 찾으셨다. 일에서 벗어나도 같이 지내던 친구, 동료 선후배들과의 만남을 지속 이어갔고 변함없이 움직이셨다. 단체 여행, 사교모임, 성당 활동, 동네 산 산책 등, 나름대로의 활동은 꾸준히 하셨다. 결국, 암이라는 존재, 그것도 말기 간암이라는 시한폭탄을 짊어지고도 본인이 해오시던 방식대로 삶을 지속하신 것이다. 이것이 20여 년을 간암 말기에도 버티게 한 아버지의 생존력이자 에너지였던 것 같다. 집에서, 가족과는 가벼운 대화도 없이 평생을 해오시던 방식으로 투병기간에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밖에서 보내셨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을 못하는 분이셨다. 20여 년을 암과 투병할 정도로 마음과 정신은 무척 강하셨고 부산에서 서울대 병원까지 항암 치료 때마다 혼자 다니셨다. 늘 그러했듯이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20여 년 스스로의 방식으로 버티셨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셨다. 생각, 마음은 있으나 그저 표현하지 못하는 분이셨다. 아니 표현할 줄을 모르는 분이셨다.
본인의 운명으로 만든 가족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가족 밖에 계셨다. 마지막까지도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하시고 떠나셨고 “아들아 사랑한다”라는 말을 결국 듣지 못한 채 떠나보내 드렸다.
그 대물림을 안 하겠느라고 생각했던 나는 더 표현을 할 줄 모른다. 소중한 가족들에게, 자식들에게 말로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고, 대화를 많이 하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있으나, 그다지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혼자 다짐만 하고 실천을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아버지를 잘 모르는 자식이었다. 아버지 정신의 강건함과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었다. 아버지의 표현을 모르는 자식이었다. 이 모자라는 자식을 어찌해야 할지… 아버지 떠난 뒤에 하나씩 알게 된다. 하시고 싶은 얘기들이 뭐였는지…
아버지의 치킨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었고 아버지의 피아노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