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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옹 Jun 17. 2024

우리는 친구


  하지가 가까워지니 해가 일찍 떠오른다. 아침 6시만 되면 늦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강한 햇살이 창문을 때린다. 6월은 아침운동하기엔 가장 좋은 계절이다. 이른 아침에 나서면 그저 삽상하다. 아직은 무덥지 않은 날씨 덕분에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숲길로 들어서면 이제 제법 무성한 잎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니 청량한 공기와 더불어 무척 상쾌해진다.


    요 근래 아침마다 에르킨딕 가로공원길을 걷고 있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서 바깥출입이 어렵고, 대기도 매우 혼탁한 나라이니, 할 수 있을 때 맘껏 운동하고 몸에 산소를 충분히 담아 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도 두 할머니가 사이좋게 걷고 있다. 두 분은 멀리서 봐도 즉각 알아 볼 수 있다. 우선 두 분의 모습이 형성하는 L자 윤곽이 대조를 이루고, 옆으로 기우뚱 기우뚱하며 넓지 않은 산책길을 가득 채우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한 분은 키가 크고 뚱뚱한 할머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양손에 지팡이(스틱)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다른 한 분은 난쟁이 할머니다. 안짱걸음에 평생을 키 큰 사람들과 얘기하며 살아오느라 고개가 아예 위로 치켜들려 있는 체격이다. 그런데 두 분이 서로를 바라보며 정말 다정한 눈빛으로 쉴 새없이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세발 걷다가 멈춰 서서 얘길 나누고, 또 세발 걷다가 멈추곤 깔깔 거리며 함께 웃는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으신지 2.8km, 끝이 안보이게 길게 뻗은 가로공원을 걷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바보스럽다.


  문득 50년 전 대학 1학년 신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신 얘기가 생각난다. “이성(理性)은 앉은뱅이고, 감성(感性)은 맹인입니다. 두 사람이 개울을 건너야하는데 이성 혼자서는 옴짝달싹 못하고, 감성 혼자서는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감성이 이성을 업고 이성의 지시대로 걸어가면 개울을 건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입시 공부하느라 이성만 배양해 왔으니, 이제부터는 감성을 키워서 균형된 인격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좋은 핑계거리였다. 어리석은 필자는 ‘공부는 그만하고 이제부턴 놀아라’라는 충고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은 접어두고 감성만 키우느라 황금같은 대학생활 2년을 허송세월했다. 둘이 손잡고 함께 가야 된다는 말씀이셨는데...


  키 작은 할머니는 이성이다. 키 큰 할머니는 감성이다. 초여름 에르킨딕에 이성과 감성이 아름답게 걸어가고 있다. 오늘도 두 분이서 짝을 이루어 공원 가로수길을 웃음으로 뒤덮고 있다. 헤어지면서 두 분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다 믜 드루지야(Да, Mbl Дpy3bя)”. ”그래 우린 친구야”


  설산에서 내려온 맑은 도랑물도 재잘재잘 웃으며 길 옆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삽상한 6월의 아침이다.              


                                                                     (2024. 06. 17 비슈케크 에르킨딕 가로공원에서)


그리고 한달 후. 또 한명의 말벗이 생겼다. 다정함이 새 친구를 불러들였다. 이제 셋이서 다니는 가로수길이 한결 더 비좁다. 언젠가 나도 그들과 함께 걸으며 얘길 나누고 싶다. 도레미파 대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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