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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인 Jul 03. 2024

천산북로(天山北路) 2

고희(古稀) 기념 여우회(麗友會) 중앙아시아 여행기: 키르기스스탄

  2024. 04. 27()

 

  피곤해서 곤하게 잘 것 같았는데 꿈결에 계곡에 두고 온 배낭이 눈에 어린다. 불량품이라서 내 차지가 된 것이지만 아들 녀석 최초의 배낭 디자인인데 그냥 산속에 내버려 두면 안될 것 같다. 어제 하산 길에 비 맞으며 오르던 등산객도 마주치지 않았고, 회색빛 배낭도 바위색과 비슷하여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 같기에 누가 집어가지도 않았을 것 같다. 아침 6시 눈 뜨자 마자 아내를 독촉하여 집을 나섰다. 그런데 밤새 목감기가 악화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얀덱스로 차를 부르니 다행히 금방 응신이 온다. 도요타 캠리차다. 우리가 한국에서 마지막 타던 차였는데 뭔가 행운이 따르는 것 같다. 차량 한적한 도심을 벗어나서 공원 입구에 다다르니 역시 아무도 없다. 택시기사에게 편도 1,500솜을 지불하고 1시간 후에 내려올테니 기다리겠냐고 흥정하니 그러겠노라고 한다. 빈차로 나가기엔 너무 먼 길이다.


  아내는 천천히 올라오라고 하고 나 혼자 속보로 산을 올랐다. 아무리 급하지만 아침 경치는 또 다른 멋이 있다. 가끔씩 카메라로 풍광을 찍으며 올라갔다. 개활지를 지나면서 문득 야생동물, 특히 늑대가 나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든다. 주변에 자갈이 많으니 돌팔매질로 쫓을 수 있겠거니 하는 담대함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계곡에 가까워지니 혹여 누가 가져가진 않았을까? 밤새 불어난 계곡물에 떠내려가진 않았을까? 야생돌물들이 뜯어서 발기발기 헤쳐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언덕을 오르니 저 앞에 회색 배낭이 그대로 있다. 반가워서 쫓아 내려갔다. 겉면만 물기가 젖었을 뿐 얇은 잠바도, 꿀도, 선글라스 케이스도 그대로 있다. 의기양양하여 산길을 뛰어서 내려왔다.


  친구들에게 출발시간을 10시로 1시간 늦추자고 요청해 놓은 상태라서 집에 들러 찾아온 배낭을 올려다 놓고 친구들 숙소로 갔다. 한인이 운영하는 실크여행사를 통해 예약한 스타렉스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틀에 기름값 포함 250불로 상당한 할인을 허락 받았기에 현지인 기사가 나오거니 했더니 박현 대표께서 직접 나오셨다.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할리우드 스타처럼 젊고 멋지다. 집 열쇠를 회수하여 경비실에 맡기고, 집주인에게 연락을 취한 후 이시쿨 호수로 향발했다.

  이 길은 그 옛날 실크로드의 천산북로다. 7세기 현장법사와 혜초가 지나갔고, 753년 고선지 장군이 북로정서(北路征西) 대군을 이끌고 지나간 길이자, 비슈케크에서 100여 km 떨어진 Tokmok(素葉水城)에서 태어난 시성 이태백이 5살 때 소그드 상인으로 추정되는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로 들어간 길이다. 또한 13세기 초, 분노에 찬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호라즘(Khwarazm) 왕국 원정을 위해 지난간 길이자 1272년경 호기심 많은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대원제국의 수도로 향하던 그 길이다. 오늘은 그 길을 대한민국의 70살 먹은 유쾌한 노인, 여우 6명이 달리고 있다. 멀리 설산이 문득문득 보이는 광활한 벌판을 지나치며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가는 즐거움 가득한 여정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였다. 붉은 사암지대와 구릉이 생성된 배경에 대해 지리학자인 유계공이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해 주고, 박현 대표가 주변 지명에 얽힌 재미있는 추론을 제시해 주어 지적 호기심을 붇돋아 주었다. 키르기스어로 이시쿨은 ‘따뜻한 호수’요, 호수 동쪽 끝의 도시인 발륵치는 ‘어부들’이란 뜻이라고 했다. 장사치, 양아치하는 직업을 나타내는 한국어의 접미사 ‘치’가 공통으로 사용되는 것도 재미있고, 우리가 가는 도시인 촐폰아타가 ‘별의 아버지’로 촐폰이 고구려의 도읍인 ‘졸본성’에 쓰여 ‘별의 성’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재미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따’이고 어머니는 ‘아빠’라는 키르기스어도 재미있었다.


  오후 2시 촐폰아타(Chopon Ata) 도심에 도착했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제법 인기있는 식당인 U Rybaka에 가서 송어요리와 고기 볶음요리를 주문했다. 촐폰아타 지역의 맥주와 더불어 맛있게 요기하였다. 식당 바로 뒤에 있는 문화박물관인 Rukh Ordo(키르기즈어로 ‘영혼의 집’)를 방문하였다. 이시쿨 호수가에 자리잡은 멋진 입지다. 앞으로 푸른 호수가 펼쳐져 있고 반짝이는 호수 넘어 설산이 구름과 엉켜서 수평선 위로 솟아 있다. 뒤편으로도 설산이 박물관을 굽어보고 있는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입지다. 가히 지형만으로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명소다. 이 곳은 고아로 자란 입지전적인 현지인 사업가(고려인이란 소문도 있다) Tashkul Kereksizov가 거금을 들여 키르기즈인의 정신세계를 고양하기 위해 설립한 박물관이다. 전시품목으로 보면 일관성이 없는 잡다한 작품들이 섞여 있는 공간이지만, 설립자의 철학이 반영되어 키르기즈 민족의 역사와 문화, 영향을 끼친 위인들을 구현해 놓은 역작들이다. 불교, 기독교(동방정교, 카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의 자그만 성전을 건립해 놓았고,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 아타투르크 케말 파사의 동상까지 있다. 심지어 한국 정부에서 기증한 자그만 팔각정 종각에 범종까지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역점을 둔 건물은 민족영웅인 마나스의 성전과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작가인 Chingiz Aitmatov 기념관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현충원이나 독립기념관 같단 생각도 든다. 호수를 향한 가장 앞면에도 백조 두 마리를 거느리고, 긴 고깔모자를 쓴 채 전장에 나선 군인들을 독려하는 여인의 웅장한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서광공이 한국의 범종을 울리고, 담곡공이 Aitmatov의 벤치동상에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사진을 찍었다. 엉큼한 사내들은 저마다 그리스 여신을 감싸안고 사진을 찍었다. 약간은 정체불명의 박물관이지만 워낙 입지가 좋아서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찍기 좋은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설립자 가족이 부정축재한 집안으로 찍히면서 박물관을 국가에 헌납했고 정부에서 1인당 500솜의 제법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1달 전쯤 사전 답사여행을 온 날은 날씨가 정말 청명하여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천산산맥의 설산이 파란 호수에 투영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당시 그 광경에 감탄하고, 이 장소를 관광명소로 활용하라는 염원을 담아 영시 1편을 지어서 직장동료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설립자의 따님이 그 시를 받아보고 5월중 부부동반 식사에 초대하겠다는 연락을 전해 왔다. 다분히 키르기즈를 널리 홍보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졸작시지만 여기에 소개해 본다.     


 Rukh-Ordo, the Nomad Sanctuary     


 Feeling breeze touching my cheek in slight,

 I wandered through time in the midst of light

 On a sunny spring day with awe and delight      


 Then I came across the most beautiful gallery on earth

 At the heart of the Eurasian continent in the depth     

 

Nestled in the foothill of cobble mountains

 Keeping the ingenuous rock arts of ancient ancestors

 It is a sanctuary encompassing the spirit of the Kyrgyz     

 

Surrounded by magnificent mountain ranges

 Covering all griefs and sorrows of mundane world with white snow

 It is a sanctuary representing the purity of the Kyrgyz     

 

Located on the tranquil lakeside of the Issykul

 Holding all water streams from the Altai to the Ala-Too

 It is a sanctuary symbolizing the generosity of the Kyrgyz     

 

Facing the glamor of white mountains floating over the clouds

Overlooking millions of cobalt-blue glitterings on the lake      

Rukh-Ordo shares the warmth of nomads

For those who need healing and condolences

For those who seek wisdom and eternity      

 

At the heart of the Eurasian continent in the depth, 

Today I came across the most inspirational gallery on earth.    

 

  오후 4시 30분. 더 늦기 전에 예약해 둔 배를 탈 시간이다. 급히 차를 몰아 선착장으로 갔다. 관광객이 없어서 겨우내 정박되어 있던 배인지 출항하는 엔진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매우 고약하다. 우리 6명에 박현 대표, 그리고 43년간 이시쿨호수에서 배를 운행했다는 선장과 3명의 러시아계 선원을 태우고 호수 가운데로 출발했다. 행운이란 뜻을 가진 Fortuna호다. 제주도의 3.5배, 서울의 10배 크기의 바다같이 넓은 호수. 설산의 눈이 녹아 흘러들어오는 강물은 있어도 땅속으로 스며들어 가는지 어느 곳으로도 흘러 내려가지 않는 호수, 그래서 호면이 매년 2-3cm씩 올라가고 있다는 신비한 호수다. 현재는 호수면이 해발 1,607m에 이르고 있다. 물리학자인 서광공이 얼른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준다. 콜로라도의 덴버시가 ‘A-Mile-High City’란 별칭을 갖고 있고, 그래서 야구장 Coors Field가 ‘투수들의 무덤’인데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노라고...

  설산으로 둘러쌓인 신비한 호수다 보니 여러 가지 전설도 많이 떠돌고 있다. 호수 속에 도시 몇 개가 잠겨 있다고도 하고, 수백 킬로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Balkhash 호수에서 침몰된 배의 잔해가 이시쿨 호수에서 발견되었다던지, 심지어는 징기스칸의 무덤이 이 호숫가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까지 회자되고 있다. Fortuna호는 촐폰아타항이 아득히 보이는 호심까지 나아갔다. 호수 건너편 남쪽 풍광이 조금 가까워졌지만 구름이 워낙 짙게 드리워 설산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석양 햇살이 비추는 쪽에 구름이 살짝 걷힌 공간으로 멀리 설산의 웅자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 북쪽과 북동쪽 사면의 설산은 하얀 능선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미녀의 옷자락 위로 노출된 하얀 어깨처럼 설산의 능선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늙은 오빠들은 배를 탄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다. 연신 카메라를 사방으로 돌리며 감격에 젖는다. Santa Lucia 노래를 선창하고 싶으나 목이 잠겨서 침묵의 미소로 바라볼 뿐 노래부를 엄두도 못내서 아쉬웠다. 열심히 친구들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배는 큰 원을 그리며 출발지로 회귀하기 시작한다. 저녁 무렵이 되면서 날씨도 차갑다. 입항할 때까지 선실에 들어가서 창 넘어로 이시쿨호수의 풍광을 만끽했다. 1시간에 6,000솜(9만원)에 배 전체를 빌렸으니 싸게 이용한 셈이다.

 

  암각화공원은 내일 오전에 들르기로 하고 3km 떨어진 Dolinka란 마을에 있는 온천장 숙소인 Ak Bermet(백진주) Resort로 갔다. 역시 3월말 답사여행 때 와 본 곳이라서 내겐 낯설지 않다. 둘이서 방 1씩 배정 받고 온천욕을 하기로 했으나 신도철과 함께 쓰기로 한 404호실 방이 열리지 않아서 이리저리 오가며 해결하느라 거의 30분을 허비했다. 정말 서비스 정신은 바닥인 호텔이다. 소비에트 시절에 공산당원들의 휴양소 내지는 요양원(sanatorium)으로 활용되던 시절을 불하 받아서 운영하는 호텔이니 영어도 안 통하고, 신용카드도 안받아서 뭉치돈을 준비해 와야 하는 이상한 리조트다. 그러나 야외온천장은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근대화된 시설로 알려져 있다. 각각 다른 온도의 노천탕이 6개가 있다. 드디어 준비가 되어 일행들과 온천을 즐겼다. 지붕 너머로 설산을 바라보며 즐기는 온천욕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비교적 간단히 온천을 한 후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손님은 많은데 홀 서빙하는 직원은 젊은 여성 딱 1명이다. 주문 받으랴, 계산기에 입력하랴, 수저-접시-물잔 갖다 주랴, 음식 날라 오랴, 계산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이 바쁘게 불려 다닌다. 미안해서 주문할 염치도 없는데 나는 목도 아프고, 피곤해서 정신이 몽롱하고, 어떻게 시켜야 되는지도 모른 채 이것, 저것 시키다 보니 음식이 드문드문 나온다. 뭘 먹었는지 기억도 없이 긴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옆 테이블에는 건장한 청년들 20여명이 자기들이 들고 온 고기를 잔뜩 쌓아놓고 신나게 뜯고 있다. 늑대 다음으로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유목민 키르기즈인들의 엄청난 고기 소비를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겨우 밥을 먹고 나니 온천장을 즐길 시간이 30분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방으로 돌아갔다. 중간방에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우주적 이념전쟁의 신봉자인 해산공이 자신이 쓰고 온 서울대학교 White Cap을 설명하면서 다시 한번 Deep State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임을 표방하였다. 그동안 여러 번 들어왔지만 워낙 스케일이 큰 얘기라서 참 수긍하기 어려운 주제다. 모두들 의아해 하지만, 아무도 해산공의 말을 저지하지도 않는다. 和而不同의 원숙한(혹은 노회한?) 교우관계다. 이럴 때는 오히려 말을 할 수 없음이 편리하구나 하는 생각도 혼자서 해보았다. 11시 넘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솜처럼 피곤해서 정신없이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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