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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산인 Jul 03. 2024

천산북로(天山北路) 3

고희(古稀) 기념 여우회(麗友會) 중앙아시아 여행기: 키르기스스탄

  2024. 04, 28()


  어떻게 잤는지 모를 정도로 잘 잤다. 침대 속에서 살그머니 목소리를 내보았다. 다행히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 마지막 날에는 두런두런 얘기라도 나눌 수 있어야지... 일출이 6시 38분이라고 했다. 7시쯤 룸메이트 신도철과 호숫가에 가보자고 밖으로 나갔다. 벌써 김상열과 정학섭이 로비에 나와 있다. 4이서 천천히 호숫가에 이르니 일출 시간에 맞춰 이미 호숫가를 거닐고 돌아가는 김석진과 옥한석을 마주쳤다. 다시 돌이켜 세워서 6명이서 호수에 지어 놓은 나무데크 끝까지 걸어가면서 사진도 찍고 풍광도 감상했다. 오늘 아침도 호수 건너 남쪽의 설산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지만, 북쪽 설산은 꽤 잘보인다. 동쪽 하늘 멀리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일출은 보지 못했으리라. 아쉬운 마음에 이시쿨 호수물에 손을 담가 보라고 권유했다.

  Ak Bermet Resort는 숙박동은 엉성하지만 부지가 10만평은 됨직한 넓은 숙박시설이다. 이스쿨 호숫가에 private beach도 있고, 넓고 높은 나무 데크가 호심으로 7-80m 정도 뻗어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우선 7시 50분쯤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온천욕을 한번 더 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김상열과 정원을 거닐어 호숫가 가까이까지 한번 더 산보를 하였다. 7시 50분에 로비에 나가보니 옥한석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간게지?하고 의아해 하는데 카톡사진이 왔다. 벌써 혼자서 온천을 하고 있었다. 비슈케크 버스 안에서 그 짧은 시간에 옆 자리에 앉은 키르기스 여성과 인스타그램 연결을 했다고 자랑하더니, 유계공은 역시 늘 한 발 앞서가는 사나이다. “못 말려~” 다 함께 웃으며 구내식당으로 갔다.


  아침식사는 생각보다는 여러 가지를 차려 주었다. 식사하자마자 온천탕에 가서 약 30분 정도 밀도 높게 온천욕을 즐기며 사진도 찍었다. 아침에 공지한 대로 9시 반에 체크하려고 하였으나 리셉션 데스크가 닫겨 있어서 또 한번 우왕좌왕하다가 10시나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정말 서비스 마인드 제로인 호텔이다. 그래도 지난 번과 달리 이번에는 일반 객실 3개를 확보할 수 있어서 비교적 저렴하게 숙박할 수 있었다. 2인 1실에 조식 포함 7,000솜씩 21,000솜(약 236달러)에 투숙하였다.

  어제 시간이 늦어져서 못 본 암각화공원을 가기로 하고 다시 촐폰아타로 되돌아갔다. 암각화공원(The Petroglyps of Chopon Ata)은 도시 윗 편 산중턱에 있다. 산록에 어마무지하게 많은 돌덩어리들이 널려있고, 뒷산의 큰 봉우리들도 순전히 돌무더기산, 그야말로 뇌산(磊山)이다. 저 남쪽 아래로 이시쿨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이다. 이 곳에 수천 점의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가 있다고 한다. 언제 어느 시절에 누가 그린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그 옛날 원시수렵시대의 생활상이 바위 위에 그려져 있다. 주로 동물들의 모습이고, 간혹 사냥하는 장면도 있다. 또 크지는 않지만 간결하게 만든 석상(Barbar)들도 있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떤 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수천년 지난 후손들이 그들을 기억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영생불사하는 한 방편이라는 생각도 든다. 좀 더 뚜렷하게 남아있는 암각화를 찾아가서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삭막한 돌 산 위에서 인류의 초기 생활상을 목도할 수 있는 신묘한 야외박물관이다. 지리학자인 유계공이 각별히 큰 관심을 보인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산성비가 내릴텐데 이런 소중한 유물이 방치되어 부식되어 가고 있으니 안타깝다. 일본 JICA에서 지원하였다는 팻말이 있으나 그저 초소 설치하고 울타리 친 정도에 불과할 뿐 제대로 보존을 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동네 아이들이 공치기 놀이를 하는 것도 목도하였다. 선진국 프랑스와 스페인의 암각화가 잘 보존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반면, 후진국 키르기스스탄의 암각화는 그냥 들판의 돌덩이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수천년이 지나도 후손들이 잘 살아야 조상들이 대접 받는단 말인가?

  11시경 출발했다. 이시쿨호수 북동쪽 끝 도시인 발륵치 외곽의 주유소 매점에서 커피와 현지식 빵을 맛보고 약 20분간 휴식을 취한 후 비슈케크로 향발했다. 이번에는 정학섭이 맨 앞 좌석에 앉았다. 뒷 좌석을 바라보며 약간의 음담패설성 얘기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모두 박장대소하면서 역시 아무나 그 자리에 앉는 게 아니라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앉혔노라고 화답하였다. 호수를 바라보다 웃고, 설산을 바라보다 웃으며 지루한 줄 모르고 먼길을 달렸다. 비슈케크가 1시간여 남은 곳에서 카자흐스탄 영토의 산록이 신비하게 바라다 보이기에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가까운 풀밭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고, 저 아득한 초원에 서리가 내린 듯, 안개가 덮힌 듯, 한폭의 멋진 풍경화가 펼쳐져 있다. 곧 저 언덕 위에 무수한 양귀비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노라는 설명이다. 다시 비슈케크로 향했다. 여우님들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공항으로 보내 드리고 싶어서 비슈케크역 근처에 있는 Skyberry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인사하러 오겠다는 김철용 대표도 그 곳으로 오시라고 하였다.

  2시나 되어서야 레스토랑에 도착하였다. 식당의 멋진 분위기에 모두들 기뻐한다. 종업원들도 예쁘고 단아한 애들만 뽑아 놓은 것 같은 고급 레스토랑이다. 천천히 앉아서 휴식을 취할 형편이 안되기에 서둘러서 몇가지 대표 메뉴를 주문하였다. 도미요리와 소고기 안심요리 2종을 두세벌씩 주문해서 조금씩 맛보게 했다. 국제수준의 맛과 서빙으로 우아하게 대접해 주는 곳이다. 한국어를 공부한 여성 종업원이 있어서 간단히 한국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집 화장실이 매우 깨끗하고 광개토대왕 비석 같이 웅장한 바위로 데코레이션을 해놓았다고 하니 모두들 화장실을 다녀오고 감탄사를 발한다. 옥한석은 오랜만에 쾌변을 볼 수 있었노라고 행복해 한다. 옥한석이 자기 책 발간에 기여한 사례로 점심식사비를 내겠다고 하였으나 환영만찬과 송별오찬은 비슈케크에 사는 사람의 고유권한이니 침해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거절하였다. 말만 들어도 감사했다. 단지 후식을 즐기며 느긋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기에 아쉬웠다. 3시 10분쯤 일행을 독촉하여 레스토랑을 나섰다.

  비슈케크역 앞에서 이 도시의 명물인 에르킨딕(Erkindik, 자유) 가로공원을 따라 산책을 하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풍요롭고 화평한 가로공원이기에 내가 ‘비슈케크 상젤리제’라고 명명하였다. 모두들 이런 가로공원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부러워한다. (이 글을 쓰는 5월 첫째주에는 설산의 눈 녹은 물이 공원 안의 작은 수로를 따라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공산주의식 도시계획의 우월성을 재평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똑도굴로까지 약 500m만 산보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는 스타렉스를 타고 우리 집으로 향하였다. 그래도 이번 여행 중 동기인 황원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굼해 할 것 같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우리 집으로 모신 길이다. 집사람이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의 상징인 알라투(Ala Too)광장을 내려다 보는 신축(지은 지 5년이 되었지만 실내 리모델링을 하여 깔끔한) 아파트에 사는 모습을 보고 저윽이 안심하는 표정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 호사스럽게 사는 것 같다고 놀리면서도 자랑스러워한다. 옥한석이 최근에 발간한 도서에 내가 번역해 준 한문 취지서를 부록으로 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노라면서 책 1권을 증정하였다. 그리고는 진홍색 히비스쿠스 차를 한잔씩 마시고 서둘러 일어서야만 했다. 아쉽게도 집안에서 체류한 시간은 불과 15분 내외다.


  얼른 시내 구경을 하고 공항으로 향해야만 한다. 차를 타고 알라투 광장 앞에서 내리고 다음 탑승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마나스장군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역사박물관 옆 옥외에 전시되어 있는 석상을 구경하였다. 유라시아 초원에 흩어져 있던 석상과 거석문화를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을 연상했으리라. 원래는 역사박물관 앞에서 위용을 자랑했으나, 독립 후 새로 만든 마나스장군상에게 양보하고 박물관 뒤편으로 이전한 레닌동상을 구경하였다. 이 또한 20m 높이는 됨직한 거대한 동상이다. 우리 모두 젊은 시절 한 때 숭상했던 혁명가이기에 바라보는 눈길이 아련해졌다. 동상 앞에서 그의 손짓을 흉내 내면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내가 그 사진에 “변절자들”이란 제목을 붙여 봤다. 민중혁명의 이상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반을 그의 사상으로 뒤덮었던 사나이. 그러나 오늘날은 빛바랜 이념으로 치부 받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혁명가. 그의 동상 앞에서 한 인생의 사상적 궤적과 허무함을 느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레닌동상 맞은 편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을 바라보며 사진을 한 장 찍고 한 블럭 지나 길 모퉁이에서 대기하고 있는 스타렉스에 서둘러 탑승하였다. 그 때까지 함께 걸어온 김철용 대표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였다.

 

<변절자들>

  4시 20분 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우리 생각엔 7시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서는 5시까지는 서둘러 도착해얄 것 같은데 운전대를 잡은 박현 대표는 공항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좁은 시골길로 차를 몰고 간다. 나는 지름길로 가겠거니 했더니 그게 아니고 한국 농촌과 닮은 시골풍경을 보여주겠노라고 한다. 마나스공항은 붐비지 않는 곳이라서 출국 1시간 전에만 가도 상관이 없단다. 그러면서 느릿느릿 빙글빙글 돌아서 차를 몰고 간다. 아닌게 아니라 주변 풍광은 한국 같기도, 선진국의 풍요로운 전원 풍광 같기도 하다. 아무튼 5시 반쯤 마나스공항 출국대에 도착하였다.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출국하는 여우들이 늦을까봐 초조해 하고, 나도 공연히 슬퍼질까봐 공항 입구에서 작별을 고하였다. 시간에 쫓기는 것 같기에 마지막 사진 한 장 찍잔 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박현 대표 차로 도심으로 향했다. 수고한 박대표에게는 당초 계약한 250불에 5.000솜을 팁으로 얹어 주었다. 너무 싸게 편안하게 잘 안내해 주셨다. 박대표도 우리 일행의 여행길에 동행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자신의 친구들과는 너무 다른, 격조 높은 팀을 모시게 되어 행복했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황교수님과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였다. 이게 다 우리 여우님들의 인격의 향기가 묻어난 때문이 아닐까요? 남은 기간동안 우즈벡에서 즐겁고 안전한 여행을 하시길 기원 드려보았다.

      


  마무리지으며


  이곳 서역 땅에 남아 친구들을 떠나보내려니, 문득 지금부터 2,000여년 전 중국 한(漢)나라 초기, 인질이 되어 흉노의 땅에 살던 이릉(李陵, ?-BC74)의 고사가 떠오른다. 이릉은 귀국을 종용하는 소무(蘇武)에게 다음과 같은 시(「與蘇武詩」)를 지어 주었다고 전해 진다.

    

 良時不再至 (양시부재지)                       

  즐거웠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리

 離別在須叟 (이별재수수)                      

  늙은이에게 이별은 반드시 있으니

 屏營衢路側 (병영구로측)                      

  방황하며 네거리 옆을 서성였고

 執手野踟躕 (집수야지주)                      

  손잡고 들판에서 머뭇거렸네

 仰視浮雲馳 (앙시부운치)                      

  하늘을 보니 뜬구름 내달리다가

 奄忽互相踰 (암홀호상유)                      

  홀연히 서로 멀어지고 있네

 風波一失所 (풍파일실소)                       

  바람에 한번 머물 곳을 잃고 나니

 各在天一隅 (각재천일우)                      

  각자 하늘가 멀리 떨어지게 되네

 長當從此別 (장당종차별)                      

  응당 오래가겠지 이 이별

 且復立斯須 (차부입사수)                      

  또 다시 이렇게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니

 欲因晨風發 (욕인신풍발)                      

  바라건데 새벽 바람이 불어

 送子以賤軀 (송자이천구)                      

  이 천한 몸이 그대를 (다시 한번) 전송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릉은 다음 문구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時因北風 (시인북풍)

  북쪽에서 바람이 불 때면

復惠德音 (부혜덕음)

  다시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李陵頓首 (이릉돈수)

          이릉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2024년 효림 황원규 또한 머리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서역 변방 먼 길 다녀가신 우리 여우들의 우정에 감사드리고, 우리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게 이 우정을 간직하면서 살아갈 것을...

     

                                                                              (2024년 5월 5일 저녁, 비슈케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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