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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옹 Jul 10. 2024

이게 나란가?

사무실 이사날의 성찰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나날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큰 가치를 모른 채 대부분의 날들을 지내고 있다. 특히 평범하게 지나간 나의 하루가 얼마나 큰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는지를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직 돌이켜 생각해 볼 때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성찰(省察)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나니...


  몇일 전 사무실을 이전했다. 두어달 전부터 이전 얘기가 나왔다. 당초 대통령실 소속 산하 기관으로 외국인투자를 담당하는 기관이란 말을 듣고 왔는데, 사무실 건물이 마치 1960년대 동대문시장 번영회같이 생긴 낡은 건물이었기에 무척 실망하고 있던 차에 새 건물로 이사 간다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달 전에는 내일 이사하니 각자의 소지품을 싸서 보관하라고 대형 비닐 봉투를 나눠주었다. 그리곤 데스크톱 컴퓨터의 전기코드까지 뽑아서 책상 위에 둘둘 말아 둔 상태로 차일피일 1달을 넘겼다. 우리가 입주키로 한 건물을 쓰고 있는 다른 공공기관이 이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세입자의 ‘명도 거부’란 말은 들어 보았지만, 공공기관들 사이에 이전을 거부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것도 수상께서 직접 결정한 것인데... “이게 정상적인 나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두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1달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이전을 했다.

 

  그런데 이사 와보니 의외로 멋진 건물이다. 크진 않지만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양식을 차용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단아한 2층 건물이었다.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페디먼트(pediment)를 받치고 서있는 삼각형 출입구가 3개가 있고, 교회양식처럼 둥근 창이 있는 하늘색으로 칠한 담자하고 기품있는 건물이다. 담장마저도 붉은 벽돌에 군데군데 망루같은 장식이 얹어져 있다. 키르기스의 민족 영웅인 마나스(Manas)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마나스 아카데미」 건물이었다.

  마나스는 키르기스 민족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세계 최장 구전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키르기스스탄은 40개의 부족으로 뭉쳐진 느슨한 공동체였을 뿐 20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왕국이나 정치조직을 결성해 본 적이 없는 민족이다. 유목민이었기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재의 천산산맥 기슭에서 알타이산맥 북쪽의 예니세이강 상류 지역까지 수천 Km에 이르는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민족이었다.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근대국가의 3요소로서의 국토란 개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 공산당 혁명 이후 ‘키르기스공화국(Oblast)’라는 연방 내의 자치정부가 사실상 첫 번째 정치적 결사체였다. 그런데 딱 한번 A.D. 840년경 키르기스 민족이 단결하여 당시 서역의 패권국가였던 위구르제국을 멸망시킨 적이 있다. 그 때의 영웅이 마나스 장군이다. 그리고 그들은 위구르왕국을 차지하지 않고, 양떼를 몰고 알타이산맥을 넘어 예니세이강 상류, 오늘날의 러시아 하카시아공화국 지역으로 유유히 옮겨 갔었다.


  소련의 해체 이후 1991년 역사상 최초로 독립하게 된 키르기스 공화국은 전설 속의 마나스 장군을 국가의 상징이자 민족 단결의 중심인물로 소환하여 추앙하고 있다. 키르기스에서 마나스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정도의 위상으로 거의 종교적으로 숭상되고 있다. 「마나스 아카데미」는 마나스 장군의 역사적 기록을 발굴-보관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국민통합의 상징적 기관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초헌법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는 기관이었다. 아카데미의 초대 이사장은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이었고, 그 분의 지원 하에 현재의 건물이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주요 기능은 연구소 겸 도서관으로,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의 대리석 나선형 계단이나 크리스탈 샹들리에 등 영부인의 섬세한 예술적 감각이 반영된 아름다운 건물이다. 비슈케크 최중심부 가로공원 근처에 위치하여 독립 이래 지난 30여년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말하자면 국가 문화재급 건물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아카데미에 근무하는 분들이 이 건물 명도를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또한 이런 유서 깊은 건물을 문화적 기능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투자청」과 「민관협력센터(PPP Center)」처럼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세속적인 기관에게 사용권을 주는 정부의 결정이 대단히 천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번 “이게 정상적인 나란가?”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키르기스 공화국도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변화를 겪은 셈이다. 건국 초기 국민통합이 국가의 지상목표였던 ‘상징의 시대’는 지나고, 국민들에게 보다 나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제공해야 되는 ‘실용의 시대’가 온 것이 아닐까? 그 변화의 상징성이 반영된 것이 우리 기관(PPP Center)의 「마나스 아카데미」로의 이전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로소 키르기스스탄이 정상적인 나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천착해 온 주제중 하나가 정부의 옳바른 역할이다. 나는 서양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역할에 관한한 훨씬 동양적 사고, 특히 유교적 규범주의에 기울어져 있는 완고한 사람이라고 자처해 왔다. 그런 내 정부관이 하루 사이에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아무리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러고 보니 평범했던 하루, 7월 1일은 내가 키르기스 변화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의미심장한 하루, 성찰을 통해 과대망상증에 빠져 본 하루였다.     

        

                                                                                              (2024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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