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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옹 Jul 13. 2024

오래된 친구

천산 기슭에서 만난 58년 지기, 그리고 그 시절

  

   엊저녁 자정 무렵 오래된 친구들이 비슈케크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호텔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잠자리에 드니 좀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누워서 천장을 보며 셈해 보았다. 1966년 봄에 처음 조우한 것이니 자그마치 58년된 친구들이다. 참 오랜 세월 숙성시킨 사이다. 그리고 주마간산처럼 추억이 흘러갔다.


  내가 충청남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청양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내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많이 배우셨으나 격동기 세월 속에서 길을 잃으셨던 아버지는 기족들을 시골 처갓집에 의탁하고 서울에 가계셨다. 가족 생활비를 보내 주시느라 온갖 허드렛 일을 하시며 고군분투하셨단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에 보험회사에 입사해서 뜬금없이 연고도 없는 논산 지점장으로 내려오시게 되어 오랫동안 처갓집에 맡겨 두었던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 속 서계신 분이 필자의 부친

  1965년 여름, 우리 식구들은 청양에서 논산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랑 누님, 동생들은 시외버스로 부여를 거쳐 논산으로 찾아오기로 하고, 아버지와 나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서 갔다. 6·25사변 때 쓰던 조그만 미군 지무시(GM) 트럭에 얼마 안되는 가재도구를 싣고 논산으로 출발했다. 정든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섭섭함도 있었지만 난생 처음 아버지와 먼길을 떠나니 나름 기분이 좋았다.


  포장도로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자갈 깔린 신작로 뒤로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나고, 길 따라 걷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서서 흙먼지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우쭐한 생각도 들었다. 개울을 건널 때면 운전수 아저씨는 얼른 미 군용 씨레이션(C-Ration) 빈깡통을 들고 나가서 개울물을 담아 차량 본넷 뚜껑을 열고 물을 부어 엔진을 식히곤 했다. 부여에선 규암나루에서 배에 차를 싣고 금강을 건넜다.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어스름 저녁때가 돼서야 논산 어귀에 도달하였다. 멀리 언덕 위에 교회의 둥근지붕이 보이고 가까이 갈수록 제법 큰 도시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디선가 기적소리도 들렸다. 청양에선 구경하지 못한 큰 도회지의 풍광이었다.

 

  아버지가 마련한 집은 논산 시내 외곽 취암동 언덕배기에 있는 초가 삼간집이었다. 땅 주인은 따로 있어서 1년에 고구마 두 말 값을 지대로 내고 사는 35,000원짜리 집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의 노력으로 가족을 불러서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을 너무 뿌듯해하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단란한 논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입학도 하시기 전에 우리 가족을 낯선 객지에 남겨 두시고 다시 부산으로 떠나 가셨다. 아마도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보험대리점을 시작하셨으니 실적이 부진하여 1년여만에 해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가 없이 사는 논산 생활 2년 반은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때는 먹을 쌀이 없어서 쉰 김치에 깡보리로 연명하고, 밤마다 모여 앉아서 가족예배를 드리며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은혜의 주님 우리 예수”란 찬송가를 울면서 부르곤 했다. 그리고 엄마는 다음 날 친정집엘 다녀왔다. 그러나 철없던 내겐 그 시절이 그저 가난했지만 평화롭게 기억되는 시절이다.


  부창국민학교를 겨우 4개월 다니고, 1966년 봄 논산중학교로 진학했다. 3월 2일쯤이었으리라. 입학성적 우수자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는 교장실에서 돈식이와 원영이를 만났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돈식이와 원영이는 수재였다. 그 때부터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나는 대학 갈거란 생각은 전혀 못하고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논과 밭을 뛰어 다니며 놀기 바쁘던 시절이었는데 녀석들은 당시에도 목표의식이 뚜렷했던 것 같다. 나뿐 아니고 당시 우리 학교 동기들은 얘들 둘을 빼놓곤 아무도 공부를 안했던 것 같다. 오직 둘만이 열심히 공부하고 중학교 시절 내내 서로 1-2등을 다투었다. 그리곤 대전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정진영. 맨 오른쪽 이돈식.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한편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지 1달만에 다시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산꼭대기 남의 집 2층에 단칸방을 얻어서 가족을 부른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슬픈 마음으로 논산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2년반 만에 가족이 다시 모여 살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 하셨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논산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다. 그러나 부엌도  화장실도 따로없는 산꼭대기 판잣집 동네 단칸방에서 7식구가 살아가는 생활은 실로 끔직했다. 물 한동이 길어 나르기, 아침에 공중화장실 한번 가는 것이 전쟁이었다. 그 더럽고, 혼잡하고, 악다구니 난장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가난하지만 교양있게 사는 것을 가풍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 가족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게다가 전학금 낼 돈이 없어서 겨우 찾아서 입학한 산동네의 비탈에 세운 중학교는 운동장이라곤 테니스코트 두면만한 것 밖에 없고, 어디서 그렇게 퇴학당하고 온 애들만 득실득실한 학교인지 폭력이 난무하였다. 학생들이 그런 애들이니 선생님들도 무시무시했다. 학교가 아니라 강제 수용소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 평화롭고 단아했던 논산중학교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을 생각만해도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나는 돈식이와 원영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이어져 갔고, 출중한 두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이 내 앞길에 자그마한 등불이 되었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두 친구의 영향이 컸다. 두 친구는 시대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20대에는 민주화의 역군으로 청춘을 쏟아 부었고, 30대에는 산업화의 역군으로 수출전선에서 열심히 노력한 용감하고 자랑스런 선진 대한민국의 건아들이다. 그리고도 "민주투사입네"하는 알량한 훈장을 팔아 평생 대접 받고 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고, 때가 되면 낙향하여 소를 키우기도 했던 담박한 사나이들이다. 이들은 내겐 단순한 친구를 넘어선 인생의 멘터들이다. 반면, 나는 도무지 겁이 많아서 민주운동에 나서지도 못하고, 산업전선에서 부딪힐 용기도 없기에 연구소 한 귀퉁이, 대학 강단 모서리에서 비겁하게 책장만 만지작거리는 문약한 사나이로 살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숨가쁜 30대-40대를 지나고 50대 초반부터 다른 두명의 중학동기와 함께 ‘놀뫼5우’로 다시 뭉쳐 오늘날까지 우정을 이어 오고 있다.


  숱한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 5명 모두 아직도 건강하고, 자식들 포함 주위에 폐 끼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저 시골동네에서 정말 볼품없이 자라온 새까맣던 촌놈들이 비행기타고 천산산맥까지 날아와서 번듯한 호텔 식당에서 조찬을 함께할 예정이다. 이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 어찌 잠을 쉽게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자는 둥 마는 둥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가로공원길을 걸어서 호텔로 갔다. 어제 오쉬(Osh)시장에서 산 간식용 마카다미아 2kg과 체리 3kg 등짐을 지고 걷는 2km의 길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녀석들 만나면 꽉 안아줘야 하나? 툭 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 앞에 다다르니 벌써 아침 잠없는 영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다. 그저 평상시처럼 멋쩍게 악수를 하고 함께 온 일행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전고 동기 16명이 함께 걷는 트래킹 여행이란다. 두 친구와 한 테이블에 앉아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8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환송했다. 송쿨호수를 시작으로 이시쿨 호수를 한바퀴 도는 3박 4일의 트래킹을 마치고 토요일 오후에 비슈케크로 돌아오는 빡빡한 여정이란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해후하는 감격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남들 이목도 있기에 생각보다 맹숭하게 떠나 보냈다.  


  이 친구들은 뭔가 특별하다. 소위 부랄친구도 아니고, 죽마고우도 아닌데,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자주보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는 친구들이다. 그저 58년을 묵힌 우정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친구들이다. 서양 속담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한 친구는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혹여 멀리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갈라지지 않는다. (True friends are never apart, maybe in distance but never in heart.)"  그렇게 자랑스런 나의 오래된 친구들이 천산산맥 넘어 서역에 왔다.                  

왼쪽부터 이돈식, 곽신환, 장원영 그리고 필자

                                                                                                            (202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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