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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옹 Jul 19. 2024

장군과 비둘기

  비슈케크 중앙역 앞 광장.

  나는 오늘도 역사의 법칙이 무너진 현장에서 허무한 인생의 잔상을 바라보고 있다.


  장군 프룬제(Mikhail Vasilyevich Frunze, 1885-1925), 그는 위대했다. 혁명은 그의 심장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그의 영혼이었다. 계급투쟁은 그의 횃불이었다. 그가 바친 일생은 프로레타리아 혁명이었다.


  그의 길에 다름은 용서 받을 수 없었다. 혁명과업을 위해서라면 로마노프 왕가의 영광도, 부르주아의 화려함도, 톨스토이의 서정마저도 그에겐 한갓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의 길에는 오직 프로레타리아 혁명 영웅, 아버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과 어머니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때의 혁명동지라도 노선을 달리한 자들은 용서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의 붉은 깃발을 위해서라면 멘세비키의 하얀 깃발도 로마노프왕가의 검은 쌍두 독수리만큼이나 증오했다. 그렇게 그는 프로레타리아 천국, 소비에트연방을 만들기 위해 광분했다.      

  그는 홍 이념 전장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으로 붉은 혁명의 최전방, 거기서도 언제나  선봉에 섰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도 스탈린(Iosif Stalin, 1878-1953)의 간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기백도 한 방울의 독극물 주사 앞에서는 파르르 떨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피 흘려 일군 러시아 프로레타리아 혁명은 코카서스 지방에서 온 한 독재자의 욕심으로 배반 당하고(The Revolution Betrayed), 이윽고 썪어 문드러졌다(The Revolution Decayed).     

  

  그리고 그는 동상으로 남았다. 애마 위에 늠름하게 앉아서, 열광하는 인민들 앞에 손을 흔들며 나타난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그는 고향 비슈케크 중앙역 광장에 우뚝 서서 오늘도 알라투 산맥의 설산을 바라보고 있다. 프룬제 장군, 그렇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칭송하고 기억했다.


  그리고 100년이 흘렀다. 그가 그토록 외쳤던 혁명도 이념도 사라졌다. 한 때는 그의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 비슈케크는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부르주아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동상 바로 옆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는 아파트에 딸린 장식품 조각처럼 초라해졌다. 허긴 그가 신처럼 모셨던 위대한 동지 레닌의 동상도 밧줄에 묶여 박물관 뒤편으로 끌려가서 설산을 등진 채 휑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있는 현실이다.

  삶에 찌들려 땅만 바라보고 지나가는 21세기의 프로레타리아들에겐 거만한 표정으로 높이 솟아 있는 장군의 동상이 억수로 부담스럽다. 삐까번쩍한 수입차를 몰고 가는 부르주아들에게는 동상 넘어 더 높게 솟아오르는 투자 물건만 보일 뿐이다.


  이제 그의 유일한 친구는 비둘기다. 애마 위로, 어깨 위로, 높이 쳐든 손등 위로, 영광의 상징 투구 위까지 걸터앉아, 도시 위로 날아다니며 보고 듣고 온 세상사 온갖 이야기를 조잘조잘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의 우매함을 꾸짖기라도 하듯 비둘기들은 방자하게도 영웅의 옷 위로, 머리 위로, 심지어는 얼굴 위로 오물을 배설하고 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이라면 장군의 정복과 살육을 한껏 비웃어 주고 싶지 않을까?    

                

  비슈케크 중앙역 광장. 새 똥으로 칠갑을 한 근엄한 장군의 모습은 오늘도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한 채 어색하게 서있다. 중앙역 너머 하얗게 비치는 설산의 순백함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사 앞에서 퇴색된 한 영웅의 초라함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상념에 잠겼다. 푸른 하늘 아래 하얀 구름이 둥실 떠서 흘러간다, 그렇게 우리네 인간들의 삶도 흘러만 간다.   

    

                                                                                                         (2014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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