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 일주일째.
청비는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고시텔의 작은 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제주와 달리 바다 냄새 대신 도시의 매연과 자동차 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좁은 방을 나와 공용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 묶은 머리, 후드티와 청바지. 제주의 '김 회장 딸'이 아닌 평범한 대학원 준비생의 모습이었다.
"좋아. 오늘도 파이팅."
스스로에게 작은 응원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준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령: 일어났어요? 오늘 아침은 제가 살게요. 7시에 토스트 가게에서 봐요.]
청비는 미소를 지었다. 서울에 온 후로 문준호와는 거의 매일 아침을 함께 먹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는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토스트 가게는 고시텔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문준호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모습이 어색했다.
"벌써 병원 가야 해요?"
"네, 8시까지 가야 해서. 인턴 생활 정말 빡빡해요."
"힘드시죠?"
"견딜 만해요. 청비 씨는 어때요? 도서관 생활."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규칙적이라 좋은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햄치즈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했다. 아침 시간이라 가게는 학생들로 붐볐다.
"참,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요. 당직이거든요."
"아, 그래요?"
청비는 왜 실망감이 드는지 스스로도 의외였다.
"대신 내일 점심은 어때요? 병원 구내식당인데, 의외로 맛있어요."
"좋아요."
문준호가 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일어났다.
"늦었다. 먼저 갈게요!"
"조심해서 가요."
그가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청비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혼자 남으니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은 이미 익숙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3층 창가 자리. 청비만의 지정석이었다. 대학원 기출문제집을 펴놓고 공부하는 척했지만, 사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진짜로 대학원을 갈까?'
처음엔 부모님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는데, 막상 공부하다 보니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마케팅 관련 과목들은 흥미로웠다.
점심은 도서관 근처 김밥천국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혼자 먹는 밥이 이렇게 적적한 줄은 몰랐다. 제주에서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는데.
오후 3시쯤, 핸드폰이 진동했다. 제주 엄마였다.
"청비야, 잘 지내니?"
"네, 엄마. 잘 지내요."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니?"
"당연하죠."
"정수남이가 네 연락처를 물어보더라."
청비의 표정이 굳었다.
"주지 마세요."
"이미 안 준다고 했어. 근데 서울로 갈 수도 있다던데."
"뭐요?"
"아버지 회사 서울 지사로 발령받으려고 한대."
청비는 속으로 욕이 나왔다. 정수남이 그렇게 집착이 심한 줄은 몰랐다.
"그건 그 사람 마음이고, 저랑은 상관없어요."
"청비야..."
"엄마, 공부해야 해요. 끊을게요."
전화를 끊고 청비는 한숨을 쉬었다. 평화로운 서울 생활에 먹구름이 끼는 느낌이었다.
저녁 7시, 도서관을 나왔다. 문준호가 없으니 저녁을 혼자 먹어야 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고시텔로 돌아왔다.
좁은 방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울이 갑자기 너무 크고 차가운 도시로 느껴졌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청비 씨, 저예요."
문준호의 목소리였다. 청비는 놀라서 문을 열었다.
"당직이라면서요?"
"잠깐 빠져나왔어요. 혹시 저녁 드셨어요?"
"방금 먹었는데..."
문준호가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딸기 사 왔어요. 같이 먹어요."
두 사람은 좁은 방에 마주 앉아 딸기를 먹었다. 문준호가 있으니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힘든 일 있어요?"
"아니에요. 그냥..."
"정수남 씨 때문이죠?"
청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봤다.
"어떻게..."
"얼굴에 다 쓰여있어요. 제주에서 연락 왔어요?"
"서울로 올 수도 있대요."
문준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어떡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피하고 싶은데..."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떻게요?"
문준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필요하면... 제가 남자친구인 척해드릴게요."
청비의 심장이 쿵 뛰었다.
"진짜요?"
"친구 돕는 거니까요."
'친구.' 그 단어가 유독 아프게 들렸다.
"고마워요, 도령 씨."
"우리가 매일 같이 다니면 소문도 날 테고, 그럼 정수남 씨도 포기하겠죠."
"그래도 되겠어요? 도령 씨한테도 소문나면..."
"괜찮아요. 어차피 병원에선 연애할 시간도 없어요."
문준호가 시계를 봤다.
"다시 들어가야 해요. 내일 점심때 봐요."
"네, 조심해서 가요."
문준호가 나간 후, 청비는 딸기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남자친구인 척. 그게 과연 '척'으로만 끝날 수 있을까.
"청비 씨, 일어나요!"
새벽 6시. 문준호의 전화에 청비가 겨우 눈을 떴다.
"으음... 몇 시예요?"
"6시요. 오늘 같이 아침 운동하기로 했잖아요."
"아... 맞다."
며칠 전부터 시작한 아침 조깅이었다. 문준호가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며 제안했고, 청비도 동참하게 됐다.
15분 후, 두 사람은 연세대 교정을 뛰고 있었다. 3월 중순의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힘들어요..."
"조금만 더! 한 바퀴만 더 돌아요."
"도령 씨는 체력이 왜 이렇게 좋아요?"
"병원에서 맨날 뛰어다니거든요."
30분의 조깅을 마치고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청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운동하니까 확실히 기분은 좋네요."
"그죠? 앞으로 매일 해요."
"매일이요?"
"네. 같이 하니까 재밌잖아요."
문준호의 말에 청비가 미소를 지었다. '같이'라는 말이 좋았다.
샤워를 하고 각자 일과를 시작했다. 청비는 도서관으로, 문준호는 병원으로.
그날 오후, 청비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문득 창밖을 봤다. 병원 건물이 보였다. 저 안 어딘가에 문준호가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지만, 마음은 이미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녁 7시, 약속 장소인 신촌의 작은 일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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