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의 사랑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세졌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며 시야를 가렸다가 열었다. 마침내 백록담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문준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정말 장관이네요."
"운이 좋은 거예요. 보통은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이거든요."
백록담의 에메랄드빛 물이 신비롭게 빛났다. 문준호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뭔가 그리움 같은 것이 어렸다.
"여기 서 있으니까 세상 끝에 온 것 같아요."
"실제로 제주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랄까,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같아요."
청비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정상에 서니 아래의 모든 것들이 작고 하찮게 느껴졌다. 정수남도, 약혼도, 아버지의 압박도.
"도령 씨는 언제 서울로 돌아가세요?"
"3주 후요. 3월 2일부터 인턴 시작이거든요."
"3주..."
청비는 갑자기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벌써 이별을 생각해야 한다니.
"청비 씨는 앞으로 뭘 하실 거예요?"
"글쎄요. 아버지는 회사 일을 도우라고 하시는데..."
"하고 싶지 않으세요?"
"네. 전혀요."
문준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말했다.
"혹시... 서울 가실 생각 없으세요?"
"서울이요?"
"제가 아는 스터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같이 공부하면 어떨까 해서요. 청비 씨도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해보고 싶다면..."
청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공부를 하라는 거예요?"
"뭐든지요. 대학원 준비든, 자격증 공부든. 중요한 건 여기서 벗어나는 거잖아요."
"도령 씨랑... 같이요?"
문준호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게... 제 원룸 근처에 작은 고시텔이 있거든요. 저렴하고 깨끗해요. 그리고 낮에는 도서관에서 각자 공부하고..."
"좋아요."
"네?"
"서울 가고 싶어요. 도령 씨랑 같이."
문준호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진심이세요?"
"네.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정수남이랑 약혼하게 될 테고... 전 그게 싫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부모님께는 의대 편입 준비한다고 할게요. 아니면 대학원 준비든지. 뭐든 핑계는 댈 수 있어요."
두 사람은 백록담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 바람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청비 씨, 저와 함께 가는 게 정말 괜찮겠어요?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오해하면 어때요? 사실 우리가 뭐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만..."
"도령 씨는 싫으세요?"
"아니요! 전 오히려... 너무 좋죠. 혼자 서울 가는 것보다 훨씬."
청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네요. 언제 출발할까요?"
"이렇게 급하게 결정해도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용기가 안 날 것 같아요."
문준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걱정과 설렘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일주일 후는 어때요? 짐도 정리하고, 서울에 방도 구해야 하고."
"좋아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하산길은 올라올 때보다 빨랐다. 두 사람 다 들뜬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공모자가 된 것처럼,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저녁 약속 지킬 수 있겠어요?"
"아, 맞다. 저녁..."
청비가 시계를 봤다. 6시였다.
"어디로 갈까요?"
"제주 시내에 아는 곳이 있어요.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
청비가 안내한 곳은 제주 시청 근처의 작은 일식집이었다. '은빛 달'이라는 이름의 가게는 골목 안쪽에 숨어 있어 아는 사람만 찾는 곳이었다.
"여기 어떻게 아세요?"
"대학 친구가 알려준 곳이에요. 관광객은 잘 모르는 숨은 맛집이죠."
두 사람은 다다미방에 마주 앉았다. 따뜻한 사케와 신선한 회가 나왔다.
"청비 씨, 정말 서울 가실 건가요?"
"네. 결심했어요."
"부모님한테 뭐라고 하실 건데요?"
"음... 이대 대학원 준비한다고 할까 봐요. 경영학 석사."
"거짓말하는 게 마음 편하세요?"
"평생 거짓으로 살아온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뭐."
청비가 씁쓸하게 웃으며 사케를 한 모금 마셨다.
"제가 김진국 회장 딸인 거 아세요?"
문준호가 젓가락을 멈췄다.
"JK그룹 김진국 회장님이요?"
"네. 그 김진국이 우리 아버지예요."
"그럼 청비 씨는..."
"재벌 2세죠. 웃기죠?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고도 자유가 없다니."
문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더 답답하셨겠네요."
"돈이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돈 때문에 더 얽매여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해요."
"도령 씨도요?"
문준호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는 대법관이세요."
이번엔 청비가 놀랐다.
"대법관이요?"
"네. 그래서 의대를 가야 했어요. 법대 아니면 의대. 그게 저한테 주어진 선택지였거든요."
"법대는 싫으셨어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어요. 늘 원칙과 체면만 생각하시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슷한 처지라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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