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여정

자청비의 사랑

by 산들강바람

제1장: 제주도의 평범한 소녀

[운명의 시작]

제주의 새벽은 언제나 바다 냄새로 시작된다.

김청비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하고 제주로 돌아온 지 두 달째. 서울에서의 4년은 꿈같았고, 이제 현실이라는 이름의 감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회장님이 아침 식사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가정부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청비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와의 아침 식사. 그것은 곧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신호였다.

"알겠어요. 금방 내려갈게요."

거울 앞에 선 청비는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제주 김 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JK그룹 김진국 회장의 외동딸. 이화여대 경영학과 수석 졸업.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스펙의 소유자.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든 타이틀이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신문을 보며 앉아 있었다. 김진국 회장. 맨손으로 제주 최고의 리조트 체인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 하지만 딸에게는 그저 답답한 꼰대일 뿐이었다.

"앉아라."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청비가 자리에 앉자 김 회장이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한국에 온다."

"누가요?"

"정 회장 아들. 수남이."

청비의 얼굴이 굳었다. 정수남. 아버지 회사의 최대 투자자인 정 회장의 아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은근히 맺어주려 했던 상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로는 더욱 집요하게 그녀에게 집착했던 남자.

"그래서요?"

"이번에 확실히 하자. 약혼."

"아버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너도 이제 스물넷이고, 정 회장 쪽에서도 계속 재촉하고 있어."

청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맛이 싹 달아났다.

"제 의견은요?"

"네 의견? 네가 다른 남자라도 있나? 졸업하고 두 달 동안 집에만 처박혀 있으면서?"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

"청비야."

김 회장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럴 때가 제일 무서웠다.

"우리 가문과 회사를 생각해야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넌 내 후계자고, 이 결혼은 필요해."

"전 사람이에요, 아버지. 회사 합병 건이 아니라고요."

청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저녁엔 꼭 들어와. 정 회장님 초대했으니까."

청비는 대답 없이 다이닝룸을 나왔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2월의 찬바람이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집안의 답답한 공기보다는 나았다.

청비가 향한 곳은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함덕 해변이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여름과 달리, 2월의 함덕은 한산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늘 이곳을 찾았다.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파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대학 시절에는 이 모든 것이 그리웠는데, 막상 돌아오니 숨이 막혔다.

'내 인생은 대체 뭐지?'

스물네 살.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 하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혼할 사람도, 물려받을 회사도, 살아갈 방식도.

"앗!"

생각에 잠겨 걷다가 모래에 파묻힌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청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첫인상은 '깨끗하다'였다. 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코트, 검은 뿔테 안경. 도시적인 분위기였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특별했다. 깊고 맑은 호수 같은 눈.

"아,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청비가 팔을 빼며 한 발짝 물러났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혼자 오셨어요?"

"네, 그런데... 여기 관광객이신가요?"

"아니요. 잠시 제주에 머물고 있어요. 공부하러 왔거든요."

"공부요?"

"의대생이에요. 인턴 시작 전에 잠시 쉬면서 준비하려고요."

청비는 그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의대생. 그것도 곧 인턴이 된다면 스물여덟 정도? 자신보다 네 살 정도 많아 보였다.

"그럼 스물일곱, 여덟 정도 되셨겠네요?"

"스물여덟이에요. 문준호라고 합니다."

"문준호..."

"아, 근데 친구들은 저를 '도령'이라고 불러요."

그가 쑥스럽게 웃었다.

"도령이요?"

"대학 때부터 붙은 별명이에요. 고전 문학을 좋아해서 늘 옛날 책을 들고 다녔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문도령'이라고..."

청비가 피식 웃었다. 의대생이 고전 문학이라니, 의외의 조합이었다.

"특이하시네요. 의대생이 고전 문학을요?"

"의학도 결국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잖아요.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철학적인 대답이었다. 청비는 그가 점점 궁금해졌다.

"저는... 김청비예요."

"청비 씨. 이름이 예쁘네요. 제주 분이세요?"

"네.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죠."

"부럽네요. 전 서울 토박인데, 제주는 정말 다른 세계 같아요. 특히 이 바다."

문준호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옆모습이 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서울은 바다가 없으니까요."

"바다뿐만이 아니에요. 여기는... 뭐랄까,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아요. 더 천천히, 더 깊게."

청비는 놀랐다. 관광객들이 흔히 하는 피상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혼자 오셨어요? 인턴 시작 전이면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혼자가 더 편해요. 그리고... 잠시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요."

"도망이요?"

문준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정해진 길, 정해진 미래로부터."

청비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도망쳐 오신 거예요?"

"도망이라기보다는... 잠시 숨 고르기? 한 달 후면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요. 현실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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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고요함, 바람의 속삭임, 강과 계곡의 흐름, 그리고 바다의 깊이를 글로 담아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저에게 가장 진실한 위로와 질문을 안겨주었습니다. 수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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