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빙(結氷)의 울림,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by 산들강바람


겨울의 복판에서 마주한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오랫동안 찌푸렸던 구름이 물러간 자리에는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순정한 빛깔이 들어찼다. 그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은 날카롭기보다 시원했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공기는 몸 안의 탁한 기운을 씻어내고,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이 거대한 자연의 한 조각임을 깨닫게 한다.


나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산의 깊은 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겨울의 마술에 걸린 듯 멈춰 선 계곡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단한 얼음장에 갇혀 모든 것이 숨을 죽인 것 같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예기치 못한 생의 합창이 들려온다.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 그것은 죽음 같은 정적을 뚫고 나오는 가냘프지만 단단한 생명의 박동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거세된 이곳에서, 그 물소리는 그 어떤 교향곡보다 웅장하게 가슴을 울린다.


계곡 너머 볕이 잘 드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품 안에서 온기가 남은 보온병을 꺼내 컵에 따르자, 하얀 김이 맑은 공기 속으로 흩어지며 은은한 차 향기가 번진다.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산중의 한기가 서서히 물러가고 기분 좋은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모닥불 대신 빌려온 이 작은 온기에 의지해, 나는 흐르는 물소리의 궤적을 쫓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본다. 산 너머의 세상은 얼마나 어지럽고 바쁜가.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에 쫓기며, 더 높은 곳을 향해, 혹은 더 빠른 길을 찾아 허덕인다. 1분 1초를 다투는 도심의 시계는 한 번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러나 여기, 차 한 잔을 마시며 머무는 시간은 느릿하게 흐르다 못해 아예 멈춰버린 듯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바쁜 것은 내가 아니라 자연뿐이다.


쉼 없이 골짜기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바쁘고, 앙상한 가지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안부를 묻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바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음 밑을 구르며 부지런히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계곡의 물소리가 바쁘다. 그들의 분주함에는 탐욕이 없다. 바람은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부는 것이 아니며, 물은 앞지르기 위해 흐르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바쁨은 그저 순리에 순응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고결한 성실함이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하늘로 낮게 깔리다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살았던가. 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 맑은 하늘 아래 놓인 이 고요한 풍경은 나에게 '멈춤'이 결코 '퇴보'가 아님을 가르쳐준다. 얼음 아래서 흐르는 물처럼, 겉으로는 멈춰 있는 듯 보일지라도 내면에서는 다음 계절을 위한 에너지를 응축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차가운 바람은 손에 든 찻잔의 온기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고, 얼어붙은 계곡은 흐르는 물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대립하는 것들이 만나 이루는 이 조화 속에서 나의 복잡했던 마음도 비로소 갈피를 잡는다. 세상에서 짊어지고 온 수많은 고민과 번뇌들은 차가운 바람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것들은 마른 나뭇잎처럼 흩날리다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 흔적마저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제 내 앞에는 오로지 맑은 하늘과 차가운 공기, 그리고 투명한 물소리만이 남았다. 산새 한 마리가 근처 바위에 내려앉아 나를 지켜보다가 다시 숲 속으로 사라진다. 자연은 나를 손님으로 대하지도, 이방인으로 여기 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 있는 바위나 나무처럼, 나 또한 이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햇살이 산마루를 넘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느덧 차는 식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서늘하고도 따뜻한 여운으로 가득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나는 진정한 휴식을 얻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길을 잃었던 나 자신을 다시 찾아 세우는 '정신적 기지개'였다.


산을 내려가는 길, 등 뒤로 여전히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내가 돌아갈 일상은 여전히 바쁘겠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내 안에는 이미 시원한 바람 소리와 찻잔의 온기, 그리고 얼음 밑을 도도히 흐르던 생명의 소리가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겨울 산이 가르쳐준 침묵의 지혜를 품고, 나는 다시 나의 길을 걷는다. 얼음이 녹고 봄이 오면, 오늘 들었던 저 낮은 물소리는 더욱 우렁찬 노래가 되어 온 산을 깨울 것이다. 나 또한 오늘의 이 고요를 양분 삼아, 내 안의 가장 푸른 계절을 피워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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