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3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오후, 나는 산길을 걸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도시가 무겁게 느껴졌고, 어딘가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등산화 끈을 묶으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을 찾으러 가는 걸까.
산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묵묵히 서서 세월을 견디는 모습으로. 흙길은 부드러웠다. 수많은 발자국이 다져놓은 길 위를 걸으며, 나는 문득 궁금했다.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을 품고 있었을까.
한 시간쯤 올랐을 때 숲이 열렸다. 산 중턱의 억새밭이었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스스스스, 억새들이 일제히 몸을 기울이며 소리를 냈다. 거대한 생명체가 숨 쉬듯.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배낭을 내려놓았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왔다. 이마의 땀을 식히고, 무언가를 어루만져 주었다. 눈을 감았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결, 풀잎들의 부딪힘,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은 눈을 감으니 더 선명했다.
도시에서 나는 늘 바빴다. 해야 할 일들에 쫓기고, 일정으로 가득 찬 날들. 어느 순간부터 멈추는 법을 잊었다. 쉬는 시간조차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확인했다. 진정한 고요를 경험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곳, 산과 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들판 너머로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가까운 산은 짙은 초록, 멀어질수록 연한 청색으로 변하다가, 가장 먼 산은 하늘과 구분되지 않았다. 산들은 서로를 감싸며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그 풍경 앞에서 작아졌다. 동시에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 뒤편에도 이런 들판이 있었다. 여름이면 풀들이 허리까지 자랐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졌다. 나는 메뚜기를 잡고, 들꽃을 꺾고, 잠자리를 따라 뛰었다. 그때의 나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언제부터 그런 순수함을 잃었을까. 어른이 되며 나는 점점 복잡해졌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성취를 좇았다. 그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 부는 이곳에서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성장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것.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처럼 흔들리지 않게, 들처럼 너그럽게.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어왔다. 나는 팔을 벌렸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답을 알 수 없었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바람은 그저 불고, 나는 그저 느낄 뿐.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억새밭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일어설 시간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배낭을 메고 산길로 들어섰다. 하산길은 올라올 때보다 가벼웠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온 것 같았다.
산을 내려와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익숙한 일상이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바람이 머무는 자리, 산과 들이 만나는 그곳이 언제나 저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안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요한 그 자리.
바람이 내 등을 밀었다. 걸어가라고, 살아가라고. 나는 고개를 들고 한 걸음씩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