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이 가르쳐 준 것들(수필)

by 산들강바람

겨울산을 떠올리면 나는 자연스럽게 숨을 고르게 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 풍경 자체가 사람의 호흡을 늦추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고, 산길은 소리를 삼킨다. 여름 내내 떠들던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흰빛과 적막만 남아 있다. 겨울산은 늘 그렇게, 가장 먼저 세상을 비운다.


사람들은 흔히 산을 위로의 공간이라 말한다. 푸르른 숲, 시원한 바람, 땀을 흘린 뒤의 개운함 같은 것들. 그러나 겨울산에는 그런 즉각적인 보상이 없다. 발걸음은 무겁고, 길은 쉽게 미끄러진다. 장갑을 벗는 순간 손끝이 저릿해지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이 내려앉는다. 겨울산은 친절하지 않다. 대신 거짓이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겨울산 앞에 서면 괜히 마음을 단정히 하게 된다. 괜찮은 척 꾸밀 여유도, 불필요한 말을 덧붙일 틈도 없다. 이 산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요구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게 길을 내주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온 이에게는 오래 머물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산은 묻는다. 지금의 너는, 이 고요를 견딜 수 있느냐고.


눈 덮인 능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갑자기 단순해 보인다. 색은 거의 사라지고, 선과 면만 남는다. 복잡했던 생각들도 이상하리만큼 정리된다. 늘 붙잡고 있던 걱정과 불안이 과연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었는지, 잠시 멈춰 묻게 된다. 겨울산은 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할 자리를 내어준다.


나는 종종 삶이 여름산 같다고 느낀다. 늘 무언가를 내어주고,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는 시간들. 싱그러움과 성취,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쉬지 않고 잎을 달아야 한다. 그러나 겨울산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 있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덕분에 더 곧게 서 있다. 무거움을 비워냈기에, 눈의 무게를 견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잠시 멈춘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붙들고 살아왔던가. 필요 이상의 말, 설명, 기대, 인정. 혹시 내려놓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잎을 떼지 못한 채 계절을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겨울산의 나무들은 말없이 가르친다. 버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고.


겨울산의 차가움은 적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냉혹함이라기보다 무심함에 가깝다. 다가오는 사람을 반기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 태도가 이상하게도 큰 위로가 된다. 세상이 늘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을 때, 겨울산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잘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서 있으면 된다.


산을 오르다 잠시 멈춰 서면, 나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고요 속에서는 작은 소리도 숨길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 두었던 질문들,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겨울산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만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든다.


하산길에 뒤돌아본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올라오든 말든, 잠시 머물다 가든 말든, 산은 변함없이 서 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은 머지않아 눈 속에 묻힐 것이다. 그 사실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세상은 나 하나의 무게로 흔들리지 않고, 그렇기에 나는 실패해도 다시 걸을 수 있다. 겨울산은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는 법을 알고 있다.


겨울은 흔히 끝의 계절로 여겨진다. 그러나 겨울산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 계절이야말로 준비의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침묵 속에서, 산은 다음을 준비한다. 뿌리는 더 깊어지고, 줄기는 더 단단해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가장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겨울산은 조용히 증명한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오면, 가끔 산을 떠올린다.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이 흐트러지는 날, 잘 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날에. 겨울산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한 문장을 남긴다.

조급해하지 말 것.


지금의 침묵도 삶의 일부라는 것.

그 문장을 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언젠가 또, 겨울산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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