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변
겨울 바다는 계절의 민낯이다. 화려한 파라솔과 들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바다는 비로소 제 본연의 색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 그 파도를 묵묵히 받아내는 모래사장,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굽어보는 소나무들이 있다. 나는 오늘, 긴 세월 동안 문장 속에 가두려 했던 그 시리고도 따스한 풍경 앞에 다시 섰다.
해변의 소나무들은 산속의 그것들과는 결이 다르다. 그들은 곧게 뻗기보다 비스듬히 눕거나, 제 몸을 꼬아 바람의 길을 터준다. 소금기 머금은 해풍은 가차 없어서, 소나무의 껍질은 용의 비늘처럼 거칠게 일어났고 가지는 한쪽으로 쏠려 있다. 하지만 그 비틀림이야말로 소나무가 바다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가장 유연한 저항이다.
겨울의 소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삶의 어느 길목에서 우리가 겪었던 시련들이 떠오른다. 정면으로 맞서기엔 너무나 거대했던 고난들. 그때 우리는 부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구부려야 했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영혼의 흉터로 남았다. 소나무의 굽은 등은 부끄러운 패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끝내 뿌리를 뽑히지 않겠다는, 수직으로 버티는 생의 숭고한 의지다.
찬바람 속에서도 소나무가 푸른빛을 잃지 않는 것은, 그가 제 안에 작은 난로 하나를 품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청진기를 대듯 줄기에 귀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수액이 얼어붙은 땅속에서 길어 올려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모래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럽다. 여름의 모래가 열기를 가득 머금은 채 사람들을 유혹한다면, 겨울의 모래는 제 몸을 차갑게 식혀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모래는 바위의 눈물이다. 거대한 바위가 파도에 부딪히고, 바람에 깎이며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끝에 도달한 상태가 바로 이 고운 입자들이다. 그래서일까, 모래사장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은 유독 깊고 선명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래는 제 몸을 낮추어 인간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낸다.
우리의 마음도 이 모래사장을 닮았다. 수많은 인연과 사건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다. 상처가 깊어 자갈처럼 서걱거리던 마음도, 세월이라는 긴 파도에 씻기고 깎이다 보면 언젠가는 이토록 부드러운 모래알이 된다. 누군가의 아픔을 말없이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바탕, 그것은 긴 시간 동안 부서져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다.
"모래 위에 쓴 글씨는 파도가 지우지만, 모래가 견뎌온 시간은 바다가 기억한다."
겨울 바다는 푸르다 못해 시퍼런 멍이 든 것 같다. 수평선 너머에서 달려오는 파도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가로 몸을 던진다. 그 소리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기도 하고, 우주가 내뱉는 긴 한숨 같기도 하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결코 같은 모양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조용히 발등을 적시고 가고, 어떤 파도는 집어삼킬 듯 웅장하게 밀려온다. 수필을 쓰는 긴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글쓰기 또한 이 파도를 닮았다는 점이다. 매번 새로운 문장을 짓지만, 그 근원은 결국 하나인 바다로 통한다.
겨울 바다 앞에 서면 비로소 고독이 축복임을 알게 된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안의 소음들이 하나둘씩 가라앉는다. 미련, 후회, 집착 같은 감정들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고, 오직 '나'라는 본질만이 앙상하게 남는다. 그 텅 빈 공간에 소나무 향기가 스며들고, 겨울 햇살이 모래알처럼 반짝이며 채워진다.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소나무와 모래, 그리고 바다가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소나무는 바람을 막아 모래가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주고, 모래는 파도의 기세를 꺾어 소나무의 뿌리가 상하지 않게 보호한다. 바다는 그 둘에게 끊임없이 생명의 습기를 전하며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이렇게 어우러짐은 완벽한 삼중주다. 서로가 서로의 경계가 되어주면서도 침범하지 않는 거리. 그것은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소나무처럼 든든하게 곁을 지키되, 모래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바다처럼 깊은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추위가 절정에 달할 때, 생명은 가장 뜨거운 꿈을 꾼다. 겨울 해변의 소나무는 이미 가지 끝에 작은 눈을 숨기고 봄을 준비하고 있으며, 모래는 차가운 얼음 밑에서 대지의 온기를 갈구한다. 바다는 얼지 않음으로써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수필은 내게 겨울 바다를 걷는 일과 같았다. 때로는 매서운 바람에 펜을 놓기도 했고, 때로는 파도에 지워지는 문장들이 아까워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만난 이 풍경은 내게 말해준다. 부서져 모래가 되어도, 바람에 휘어 소나무가 되어도, 그 모든 과정이 곧 삶의 무늬라고.
겨울 바다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등 뒤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포근하다. 모래 위에 남긴 나의 발자국은 곧 파도에 지워지겠지만, 그 길을 걸으며 얻은 평온함만은 내 문장 속에 소나무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이 수필이 당신의 겨울 마음에 작은 위로의 온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특정 장면을 더 강조하거나, 작가의 관점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풀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보완해 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