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준 날(소설)

첫사랑

by 산들강바람

�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준 날》

초등학교 3학년 봄, 새 공책이 책상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첫 장에 ‘국어’라고 적었다가 지웠고, ‘사회’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지우개 자국이 남고 종이는 점점 얇아졌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예쁜 글씨여야 그 과목도 좋아질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는 말이 없었고, 고요했으며, 예뻤다. 나는 몇 번이고 그녀를 흘낏 바라보다가, 다시 공책을 내려다봤다. 그때, 그녀가 내 공책을 가져갔다. 말도 없이.

“내가 써줄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연필을 살며시 잡고 ‘사회’라고 썼다. 그 글씨는 고르고 단정해서, 마치 마음을 담아 적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그 글씨를 오래 바라봤다. ‘고마워’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술은 조용했다.

며칠 뒤, 비가 왔다. 학교 끝나고 우산을 쓰고 걷는데, 내 옆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철수야.”

심장이 뛰었다. 너무 놀라고, 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그냥 모른 척 지나쳤다. 발걸음은 빨라졌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우산 속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보다 크게 들렸지만, 그 단 한 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그 이후, 나는 자꾸 그녀를 의식했다. 쉬는 시간에 몰래 그녀를 바라보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말은 못 걸었고, 이름도 잘 부르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에만 많은 말을 품었다.

시간은 흘러, 6학년이 되었다. 그녀는 옆 반에 있었다.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얼굴은 자주 보였지만, 그녀는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 있었다. 웃고 있고, 활발하고, 항상 주변이 밝았다. 나는 멀찍이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날, 친구들이 말했다.

“걔, 4반 누구 좋아한대.”

“걔 공부도 잘하잖아. 반에서 늘 상위권이래.”

나는 말없이 그 얘기를 들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조용히 결정을 내렸다. ‘이제 그만 좋아하자.’ 그렇게, 작고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접었다.

복도 끝에도 가지 않았다. 그녀의 반을 스치던 발걸음도 멈췄고, 바라보던 창도 더는 향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그녀가 처음 써준 ‘사회’라는 글씨와 그날 비 오는 오후에 들었던 “철수야”라는 목소리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건 첫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조용했고, 짧았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억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공책과 그날의 비를 떠올린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지만, 너무 깊게 누군가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마음을 접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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