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수박 그리고 여름의 숨결
� 책장, 수박 그리고 여름의 숨결
책장을 넘기며 더위를 식힌다. 바람은 숨죽이고 있고, 종이의 사각거림이 작은 위로처럼 들린다. 활자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문장 하나를 따스하게 비춘다. 잊고 있던 문장 하나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머릿속엔 햇살 가득한 여름이 펼쳐진다. 그 여름은 단순히 계절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며 기억이다.
눈을 들어 보면, 마을 어귀에 커다란 나무 그늘이 있고, 그 안엔 고즈넉한 원두막이 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지붕은 땡볕을 걸러내고, 지면에 가까운 나무의자와 짚방석은 세월을 품고 있다. 그곳엔 수박이 얌전히 누워 있다. 농부의 손을 거친 그 녹색 껍질은 오후 햇살을 흡수하고, 안쪽의 붉은 속살은 이미 여름의 정점을 향해 익어가고 있다.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시간은 마치 잊힌 듯 흘러가지 않는다. 바람은 느릿하게 지나가고, 나뭇잎은 서로에게 기대며 작은 수다를 떤다. 누군가 조용히 내 앞에 수박을 잘라 놓는다. 그 순간은 말없이도 많은 것을 전한다. 세상을 단순하게 만드는 힘, 여름의 소박한 기적. 손을 들어 붉은 수박을 입에 넣는다. 달콤한 물기가 입안 가득 번지며, 모든 더위는 과일 속으로 흘러들어 간 듯하다. 그 맛은 마치 축제 같다—소리도 없이 펼쳐지는 한 조각의 환희.
여름은 늘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불편함과 아름다움. 열기는 때로 숨을 막히게 하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고요는 유난히 깊다. 땀이 맺힌 손등 위의 시원한 수박 한 조각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하나의 안식이다. 조용한 오후에 펼쳐진 책장 한 장은, 기억을 따라 여름을 더듬게 만든다.
나는 다시 책장을 넘긴다. 활자 하나하나가 눈부신 태양을 견디며 자라난 여름꽃 같고, 문장은 바람처럼 스쳐간다. 그 바람은 나무의 그늘 아래서 더 부드럽게 흐르고, 나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더 오래 바라본다. 생각은 길게 늘어지고, 마음은 고요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어쩌면 여름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라는 계절이다. 수박 한 조각, 나무 그늘, 책 한 권. 이들은 모두 여름이 우리에게 내어주는 선물이며, 그 선물은 대단치 않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수박밭 끝자락의 원두막은 그 선물들의 진열장 같다. 세월과 계절, 사람과 기억이 그 아래에 조용히 포개져 있다.
이 여름도 그렇게 나에게 찾아온다. 불쑥,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리고 조용히 옆에 머물러 준다. 내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수박을 베어 물 때마다, 나무 그늘에 기대 숨을 고를 때마다—여름은 다시 시작되고, 다시 나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