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제산, 시간을 건너는 구름다리

운제산을 오르며

by 산들강바람

경북 포항의 남쪽, 해발 482미터 높이에 자리한 운제산은 겉보기에 낮고 평범한 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숨겨진 기도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산의 이름부터가 이미 그 성격을 말해준다. ‘운제(雲梯)’—구름을 잇는 사다리. 인간의 세계와 신의 영역을 잇는 상징. 이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닌, 전설과 신앙, 삶과 고요가 교차하는 하나의 서사다.

원효대사와 자장대사의 구름다리

신라 시대, 불법을 전하며 깊은 수행에 이르렀던 두 고승—원효와 자장. 그들은 운제산의 두 절벽을 마주하며 각각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계곡은 깊고 험해 서로를 직접 찾아가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은 기도의 힘으로 구름을 사다리 삼아 서로의 암자를 오갔다고 한다. 그런 영적인 교류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 사이에 놓인 다리였다.

오늘날 자장암에 오르면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당시의 숨결이 느껴진다. 절벽 끝에 서면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속삭이듯 들려오고, 멀리 오어사 방향에서 종소리가 잔잔히 퍼진다. 바람은 문득 원효대사가 웃으며 걸어오던 발걸음을 흉내 내듯 흘러간다. 침묵 속에서 되새겨지는 이야기는, 천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대화다.

운제부인의 성모단과 기우제

또 하나의 전설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비인 운제부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백성의 평안을 위해 운제산에 성모단을 세우고, 가뭄 때마다 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 번은 수개월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시절, 그녀가 맨발로 대왕암에 올라 간절히 비를 기원하자 갑작스레 먹구름이 몰려와 온 산이 단비에 적셨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대왕암에 서면 세상이 작아진다. 발아래 포항의 들판과 바다, 멀리 호미곶까지 펼쳐지지만 마음은 오히려 좁고 깊은 어딘가로 향한다. 운제부인의 기도는 단지 하늘을 향한 것이 아닌, 모든 백성의 목소리를 모은 것이었다. 그 진심은 지금까지도 운제산의 바위틈에, 나뭇잎에, 물소리에 남아 있다.

오늘의 발걸음, 시간 속을 걷다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깔딱재’라는 고개를 만난다. 짧지만 가파른 길. 이 고개를 넘으면 풍경이 열리고, 숨결이 정돈된다. 해병대 훈련장으로도 쓰이는 이 길은 강인한 정신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연이 건네는 부드러운 위로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손길처럼 따뜻하고 잔잔하다.

계곡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는 단순한 자연음이 아니라, 이야기의 이어 짐이다. 나그네가 흘린 눈물, 기도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숨결, 전설 속 인물들의 발자취—all 그것들이 한 줄기의 물에 실려 흘러간다. 바람은 말을 하지 않지만, 모든 걸 말해준다.

운제산의 정상에 서면 그저 풍경이 아닌 마음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어쩌면 신라의 배들이 떠났던 곳일지도, 고요한 수평선 너머에는 구름다리가 다시 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은 오늘의 나—과거와 미래, 신화와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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