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느티나무 그늘아래

추억 3

by 산들강바람


한가한 여름 오후였다. 볕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듯 내리쬐었고, 들판의 풀잎들은 한낮의 열기에 지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만은 달랐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그 나무는 굵은 뿌리를 땅 깊이 내리고, 가지를 넓게 펼쳐 마을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늘 아래 놓인 평상에는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아이들은 맨발로 흙바닥을 뛰어다니며 웃음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큼지막한 수박을 들고 나타났다. 윤기 흐르는 푸른 껍질은 벌써부터 달콤한 맛을 예감하게 했다. 커다란 칼이 수박에 들어가는 순간, “뚝”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갈라진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씨알이 박힌 붉은 빛깔은 보는 것만으로도 갈증을 잊게 만들었다. 잘라낸 조각이 사람들 손에 하나씩 건네지자,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큼직하게 베어 물었다.


“와, 시원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아이들 눈이 반짝였다. 검은 씨를 뱉으며 누가 더 멀리 날리는지 겨루는 사이, 어른들은 수박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세상 시름을 잊은 듯 담소를 나눴다. 올해 농사가 어떻다, 누구 집 손자가 이번에 상을 받았다, 지나가는 바람결에 함께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가볍고 따뜻했다.


평상 끝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아이들이 흘린 수박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그늘보다 더 깊고 넉넉한 쉼을 주는 듯했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서늘한 기운을 내려보냈고, 웃음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그날의 수박 한 조각은 단순히 갈증을 채우는 과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함께 나눈 여유였고, 마을을 하나로 이어주는 달콤한 끈이었다. 특별히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바로 그런 평범함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음의 온기를 나눴다.


시간이 지나 여름이 끝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오후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웃고 떠들며 먹던 수박 맛,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겨움은 내 마음속에 시원한 바람처럼 불어와 여전히 갈증을 달래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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