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의 자리, 방파제 끝에서

저녁 항구

by 산들강바람

바다향이 머물고 있는 항구 어딘가에, 낮으하니 어둠이 내려앉는다. 포항의 저녁은 늘 그렇게 조용히 찾아온다. 해가 바다 너머로 천천히 몸을 숨기면, 항구는 하루의 소란을 내려놓고 고요함을 입는다. 그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다. 바람의 숨결, 파도의 속삭임, 갈매기의 낮은 울음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고요다.


나는 그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파제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느릿하고, 마음은 그보다 더 느리다.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주머니 속에는 오래된 기억 하나. 이곳은 내가 자주 찾는 자리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 공간. 그저 바다가 나를 바라보고, 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


방파제 끝에 앉으면, 세상이 조금 멀어진다. 도시의 불빛은 저 멀리서 반짝이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파도에 묻혀 사라진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온 날들을 하나씩 꺼내본다. 기쁨도, 슬픔도, 후회도, 그 모든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간다.


어느 날은 바다가 푸르고 평온했다. 그날 나는 오래된 사랑을 떠올렸다. 함께 걷던 이 길, 함께 마시던 커피, 함께 바라보던 저녁 바다. 그 사랑은 이제 기억 속에 머물지만,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변함없는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그 무심함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 세상은 변해도,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 어느 날은 바다가 거칠고 회색빛이었다. 그날 나는 삶의 무게에 지쳐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로와 막막함이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바다는 그런 나를 품어주었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그 안에는 깊은 품이 있었다. 나는 그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방파제는 그런 곳이다. 머무름의 자리.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살아간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지켜야 할 약속들 속에서 자신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다. 커피는 식었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어둠은 낮으하니 머물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그것은 바다의 빛이 아니라, 내 안의 빛이다. 방파제 끝에서, 나는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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