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뿌리, 나의 유년, 나의 살던 고향

by 푸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시야를 가리던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드디어 저 멀리 도시라고 부르기는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시골이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어쨌거나 '시'라는 행정구역으로 분류된 나의 고향이 보였다. 산 너머에서 타오르는 석양빛 덕분에 저 멀리 새까만 산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어둠이 짙게 깔린 평지에는 사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그 새카만 공간에 논과 밭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논밭과 길게 이어진 산맥 사이, 삼삼오오 모인 불빛이 만들어내는 건물의 윤곽만으로 나는 그곳이 어느 동의 어느 동네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뿌리, 나의 유년, 나의 살던 고향.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향수를 느낄 테지만, 사실 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던 고향이 한눈에 보이자마자 숨이 꽉 막혔다. 세상과 단절된 고향이란 미로에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고속도로를 달려 마침내 톨게이트에 진입하던 그 순간, 그리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보다 한숨이 흘러나온 이유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어릴 적부터 나는 고향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막내 삼촌이 여전히 사는 곳이자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짙게 간직한 곳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늘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옮겨도 산이 있는 작은 도시. 아버지가 사는, 한 때는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겹겹이 겹친 산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산은 누군가 연회색으로 허공에 색칠을 한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는 그것이 감옥의 창살 같이 느껴졌다. 산에게는 죄가 없다. 하지만 나는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 한기가 돈다. 추운 겨울,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밤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와 냉골이 된 바닥이 어서 따뜻해지길 기다리던 그 시절에 느꼈던 한기가 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무기력함을 느낀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과 우울한 기억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났기 때문일까. 이제는 사라진 옛 동네를 지날 때면 억울하게 혼이 나 골목길을 따라 울면서 뛰어가는 내가 보이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의 괴롭힘을 무시하며 묵묵히 다리를 건너던 내가 보이고,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밤길을 걷던 내가 보인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무너지고 짓밟힌 자존감은 회복할 길이 요원한 채로 방치되었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 누구도 나의 내면에 깊게 자리한 어둠을 알아차리지도, 알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른들의 눈에 나는 예민한 아이였다. 풍족하게 살면서 불만만 많은 예민해 빠진 아이.



그래서 우울함과 좌절감에 파묻혀 괴로워하던 20대의 나를 고향에 남겨두고, 마침내 나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일찌감치 충청남도의 작은 도시 (고향보다는 훨씬 큰 도시)로 이사를 갔다. 그 후로 바라던 대로 매사가 불안하고 우울함에 몸부림치던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온전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 매사 부정적인 나에게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 나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 사람. 1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더는 헤어질 염려 없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그날부터, 나는 내 인생이 불행하다 느껴본 적이 없다.

하늘보다 산이 더 많이 보이는 고향의 하늘과는 정반대로 끝도 없이 멀리 펼쳐진 하늘이 있는 이곳의 풍경이 퍽 마음에 든다. 새파란 수평선을 바라보며 끝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무조건적인 내 편, 무조건적인 사랑이 뒤를 받치고 있다는 든든함이 나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다.



그래서일까. 고향에 가는 날이면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한 후 끝없이 등장하는 터널과 높아지는 산들이 내가 경상도에 돌아왔음을 상기하는 순간부터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다는 반가운 마음에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뒤따라온다. 그렇게 죄의식을 느끼며 고향 땅을 밟는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고향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절대 모를 것이고, 나도 이해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 대신 과거에 좋지 않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그때의 기억을 털어놓으며 투덜거린다. 추풍령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듣고 역정을 내시겠지만, 나는 참 못된 손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나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인구 감소로 인해 언젠가 사라질 지 모르는, 나의 뿌리가 깊게 내려있는 그 곳.

울며 걸었던 길의 끝자락,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가끔 나를 마중 나와 있던 할머니의 인영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완전히 고향을 떠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결코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걸 부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나는 고향으로 간다.

기차에 몸을 실어 고향 집을 떠났던 나는 이제 내 소유의 차를 몰고 고향으로 간다.

언제든 자유로이 고향을 벗어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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