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일부러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by 푸르다

일을 나가지 않으니 자동차를 굴릴 일이 거의 없어졌다. 웬만한 곳은 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데다 남편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기에 더더욱 차를 끌고 나갈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최근 차량 점검을 갔다가 운행량이 너무 적어 브레이크에 녹이 슬었다고 핀잔을 들은 터라 간만에 드라이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면 외출을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에 나에게는 우선 어디를 다녀올지 선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럴 때면 내가 타고난 집순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어느 정도냐면 코로나에 걸렸을 때 일주일간 집 안에만 머무는 것이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왕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모르는 길을 달려보자 싶어 머리를 굴리다가 고속도로 IC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외곽 순환도로를 탐방하며 내가 사는 시를 크게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여태까지 네이게이션은 끈질기게 그 외곽 순환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안내해주었지만 나는 일부러 시내를 통하는 길을 골랐다. 그쪽이 익숙하기도 했고 고속도로에 올라가기 전 미리 주유소에 들르기 위함이었다. 해가 높이 떠 있는 한낮인데다 길눈이 어두운 편은 아니어서 내비게이션 없이 주행을 시작했다.


뻥 뚫린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다 보니 'XX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이대로 큰길을 따라가면 익숙한 도로가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나는 일부러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핸들을 꺾어 생전 처음 보는 시골 마을의 흙길로 접어들었다. 나에게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고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기에 처음 보는 길을 헤맨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더욱이 결국 길은 다 이어져 있고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터라 거침없이 시골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오롯이 방향감각에만 의존해 좌회전, 우회전 없이 그저 길을 따라갔다. 좁은 흙길이 한동안 이어지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시작되었다. 좌우에 논과 밭이 쭉 펼쳐져 있었고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그러다 한동안 주택가가 보이지 않았고 황량한 들판이 나타났다. 그래도 가끔 보이는 버스 정류장이 내가 문명이 닦아놓은 길을 이탈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기에 안심하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이윽고 언덕을 끼고 급격하게 꺾인 도로가 눈앞에 나타났고, 혹시라도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마주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속도를 최대한 줄여 천천히 모퉁이를 돌았다. 다행히 넓게 펼쳐진 논밭과 한창 벼를 수확 중인 땅이 보였고, 도로를 따라 커다란 흙덩어리가 헨젤의 빵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길잡이로 삼아 액셀을 밟았다.


여전히 낯선 풍경이 이어졌지만 나는 이곳이 어쨌거나 내가 사는 시의 어느 외딴 동네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을 탐방하는 기분. 일부러 길을 잃어보는 것도 꽤 근사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인생이라는 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 취직, 결혼이라는 사회에서 정해준 도로 위를 성실히 달려왔다. 그러한 도로 벗어난 지금, 마음껏 미지의 길을 탐방해도 좋지 않을까.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결국 돌아가는 길을 찾아낼 테니. 조금해진 마음이 약간이나마 가벼워진다.


마침내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만났고 나는 도시 문명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여전히 어딘지 정확히 모르지만 도로 위의 표지판을 보고 핸들을 꺾고 쭉 달려 나간다. 그렇게 당초 계획대로 나는 도시를 크게 빙 둘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꽤 멋진 드라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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