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 환자의 가족 이야기
코로나19로 인해
요양병원 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는
뇌졸중 환자, 나의 아버지는
무려 3년 만에 잠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게 나에겐 할머니이자,
당신께는 어머니가 되는 분의 장례날이지만.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그간 면회도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감염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원무과의 제지를 순순히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나의 어미는
1층에서 겨우 지아비 얼굴만 보고 물건만 들려서 보내곤 했다.
주말마다 겨우 오는 자식은 오죽했을까.
기회마저 거의 없었으니.
코로나19 이전에는
명절마다 집으로 잠시 모셔와서
친인척들 모두 얼굴 보곤 했는데...
지금은 불가하다.
내가 2019년에 결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
결혼한 해 이후로 코로나가 확산되고,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아빠를 볼 수 없었으니.
하마터면 결혼식에도 못 부를 뻔했다.
그래도 원무과에서 경조사라고
사정을 잘 봐줘서 다행이다.
노환으로 잘 걷지 못하고
허리 디스크 수술도 두 차례나 받은 할머니는
못 걸어서, 아픈 아들 못 보러 간다며
때때로 많이 우시곤 했다.
아빠가 비장애인이었을 때
그리도 극진히 모신 어머니였는데,
그는 끝까지 상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허락된 시간은
밤 11시까지였으니까.
반신을 쓰지 못하고 말 조차 하지 못하니
스스로 병원까지 가지 못하고
누가 옮겨다 주어야 하는 우리 아빠는
몇 년만에 나온 바깥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마도 복잡한 심정이었을 거다.
형제 관계로 치면,
큰상주는 아빠가 되는데
사정상 작은 아빠가 그 역할을 하게 됐다.
처음엔 작은 아빠와 엄마가 협의해서
병원에 연락해서 아빠를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놀라게 할까봐서.
한데, 조문객으로 온 먼 친척분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
평생 원망 듣는 건 둘째치고,
죽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면서...
실로 그러했다.
저를 그리도 극진히 모시던 큰 아들을 장례식장에서 못 보면
저 세상에서 할머니가 얼마나 슬퍼할까.
그래서 짧게나마 우리 아빠는 자유를 허락받았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자유였을테지.
공교롭게도, 할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겨우 다 모여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제단 앞에서 아빠는 세글자, 어머니-라고 내뱉으며
눈물을 보였다.
내게는 그런 아빠가 일종의 눈물 버튼이라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엉엉 울어버렸다.
뇌병변 장애인이 된 이후로
'어머니' 라는 단어가
아빠가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단어라서.
사랑하는 딸의 이름조차 잊었지만,
어머니. 그 세 글자만큼은 잊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는 절은 할 수 없어도
묵묵히 큰상주 자리를 지켰다.
병원에서 허락해 준 그 시간까지.
먼 친척 분들의 얼굴을 다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입관까지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 아빠를 대신해서 자청했다.
할머니 잘 보내주고 오겠노라고.
태어나서 딱 두 번, 시체를 목격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번은 중학생 때 할아버지 입관식이오,
그 두번째가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앓던 허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시신조차 다리를 쭉 펴지 못하고 굽어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 다음 세상에서는
허리 아프지 말고 꼭 펴고 당당하게 걸으시길,
생전에 팔순잔치 못 가서 너무나 죄송하고 후회하는 마음 뿐인,
당신의 자랑, 큰 손녀는 그렇게 당신을 보냅니다.
몸이 성치않은 아빠를 대신해서,
극락정토에 다다랐을 당신의 내세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만을 매년 기원하겠습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시간은 당신 없이도 잘 흐르더군요.
그렇게, 나도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겠죠.
할머니, 당신을 보냅니다.
아빠는 끝까지 우리 가족이 잘 보살필테니
안심하고 눈 감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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