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이 할머니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원조라고 잡아 끄는 손길들을 마다하고 '뚱뚱이 할머니 족발'집으로 들어간 것은 단순히 이름에서 오는 순수함과 넉넉한 할머니의 손맛을 기대한 것일 게다.
국립극장 달오름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난 후,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장충동 족발 거리에서의 만찬은 그야말로 덤이다.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의 잔잔한 여운이 족발에 딸린 막걸리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유니크한 실내장식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웠을 어두컴컴한 실내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변두리 선술집에나 어울릴 듯한 까만 바탕에 점점이 뭉게구름 모양 흰 점이 펴져있는 탁자가 1층에만 여섯 개 정도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보인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자리한 계산대에 표정 없는 아줌마가 영혼 없는 인사를 한다. 오른쪽으로는 앞쪽에 칸막이가 높게 막힌 작업대가 있는데, 주문한 족발을 여기서 바로 썰어서 주는가 보다. 들어서면서 안쪽으로 깊숙이 자리한 주방까지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뚱뚱이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너저분한 탁자는 냅킨으로 한 번 닦아 주어야만 했다.
그냥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앉자마자 낡고 동그란 쟁반에 물병과 컵을 받쳐 든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다. 족발 소자를 시켰더니 너무 양이 작아서 부족할 거라 말한다. 우리는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상관없다고 양은 충분할 거라고 말했다.
연극은 규모 있게 정돈된 이중생의 집 안마당..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고 부산스러운 중에 이미 와 있는 숙수쟁이를 데리러 용석아범을 또 보내는 모순 속에서 시작한다.
이중생은 일제 강점기엔 친일파로 치부를 했고, 광복이 되자 미군정 측에 붙어 산림회사 관리인이 되고, 제지회사를 차리려고 차관을 신청한다. 오늘 그 귀한 미국인 손님들이 오기로 한 날이다. 그는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부터 이권을 얻어내기 위해 하인의 아들 용석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하식까지 지원병으로 내보냈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도 차관을 얻기 위해 둘째 딸 하연을 미국인의 애인으로 만들 정도로 치부를 위해선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인물이다.
하얀 양복에 중절모까지 차려입은 이중생까지 나와서 비단 방석에 맥주와 안주까지 내놓고 기다려도 미국인 손님은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
양이 적을 거라던 족발은 예상보다 푸짐했다. 밑반찬은 그다지 특별하게 시선을 끄는 것은 없다. 무를 직육면체로 잘게 썰어 넣은 시원한 동치미, 고춧가루가 다소 칙칙해 보이는 무생채, 기대감에 제일 먼저 손이 갔던 작고 동그란 김치전 두 개는 맛보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우리의 입맛을 끌지 못했다. 파전을 따로 주문해서인지 쪽파를 썰어 넣고, 고춧가루 약간과 깨소금을 슬쩍 뿌려 넣은 간장종지가 새우젓과 함께 놓여 있다. 그리고 검자주색에 가까운 집에서 직접 담근 것 같은 된장종지.. 젓가락으로 아주 조금 찍어서 맛을 보았다. 음, 된장은 아주 맛났다. 미진한 모든 것들이 모두 다 용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편으로 옅은 황토색 플라스틱 작은 바구니에 상추와 푸른 고추가 담겨 있다. 주문한 장수 생막걸리가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란돌프는 결국 사기꾼으로 밝혀지고, 이중생은 사기와 배임, 횡령, 공문서 위조 및 탈세로 인해 구속되고 전 재산마저 벌금으로 잃을 위기에 처한다. 위기 모면을 위해 이중생은 자신의 거짓 자살극을 꾸민다. 그러나 상속법을 불법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던 이중생의 꼼수는 오히려 자신의 유언장이 빌미가 되어 꼼짝없이 전 재산을 무료병원 건립에 헌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하지만 이중생의 몰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지원병으로 보낸 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아들 하식이 사할린에서 갑자기 돌아온다. 아들의 귀환보다 잃어버린 전 재산이 더 중요한 이중생은 하식에게 어찌할 방도를 묻지만, 하식은 그저 아버지에게 구차스러운 가짜 수의를 그만 벗으라고만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중생은 후원에서 홀로 자살한다.
탁한 황토 색깔의 플라스틱 그릇에 따라 놓은 막걸리는 의외로 맑다. 나는 막걸리를 좋아한다. 마실 기회가 그리 흔치는 않지만 꾸미지 않고 솔직한, 다듬어지지 않은 조금은 거친 맛을 좋아한다. 그 옛날 신촌 뒷골목 어딘가에서의 순수했던 맛을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막걸리를 한 모금 입에 댄다. 주욱 반 잔을 들이켠다. 처음의 텁텁함은 사라지고 반면, 순하고 맑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머리가 조여 오면서 입안의 쌉싸래한 맛이 뭔가를 갈구한다. 족발을 한 점 집어 들었다. 새우젓에 찍어 입 안에 넣었다. 난 원래 족발을 즐겨 먹지 않는다. 느물거리는 식감도 별로지만 아무리 열심히 씹어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 안에 남아 맴도는 팅팅거리는 고무줄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뚱뚱이 할머니'의 족발은 부드럽다. 한 번, 두 번, 세 번만에 꿀꺽 잘도 넘어간다. 또 한 점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좋아하는 상추에 족발을 한 점 올리고 편으로 자른 마늘 한 개와 잘게 자른 고추 한 개 그리고 새우젓을 조금 넣고, 무생채와 된장을 약간만 넣어서 입에 넣었다. 맛나다. 입안이 행복하다. 미뢰를 떠나 미각 신경으로 미각 중추로 이어지는 나의 맛의 세계는 황홀하다. 닫혀 있던 미지의 미각도 행복하다. 나는 이제부터 족발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중생의 죽음을 통해 오영진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는 역사적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당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풍자로 대변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소외되어 억눌려 있던 지각 있는 이들의 독백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같은 이들이 비단 그때에만 존재했을까. 그들은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우리 주변에 무리 지어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향을 뿜어대며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절대로 들키지 않게 투명한 가면을 눌러쓰고 미소 짓고 있겠지.
계산을 끝내고 가게 문을 나설 때까지 뚱뚱이 할머니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