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를 만났다

그는 소행성 B612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by 윤수현

그를 드디어 만난 것은 시간을 새벽 6시로 앞당기고도 얼마간의 날들이 흐른 뒤였다.


아름다운 공원이다. 왼쪽으로 큰 차도를 옆으로 끼고 도토리나무와 단풍나무, 잣나무가 우거져있는 자연림이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고, 그들의 영역을 벗어나면 울창하지는 않으나 합리적인 간격으로 늘어선 도토리나무, 단풍나무, 잣나무 등이 보기 좋게 얼마간의 햇빛을 가려주며 늘어서 있다. 테니스코트와 농구코트가 중앙으로 자리하고 인위적인 조경들과 그 사이사이 벽돌이 깔린 산책길이 나있는 초등학교와 아파트를 울타리 삼아 둥글게 자리한 아담한 공원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내가 좋아하는 규칙적인 습관으로 초입의 단풍나무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풍나무, 잣나무, 우람한 도토리나무들의 굵은 뿌리가 대지를 뚫고 나와 무선망처럼 난해하고 복잡하게 땅 위에 펼쳐져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균형을 잃어 뒤뚱거리거나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 고목들은 아주 교만하고 거만하게 시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모근을 땅속 깊숙이 내려 박고, 하찮은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투박하고 음습한 향기만을 살짝살짝 뿌려댔다. 그들은 인간들의 끊임없는 발길이 넌덜머리 난다는 듯, 이 대지는 우리의 왕국이라고 단언하는 듯, 검고 단단하고 우악스러운 뿌리를 최대한 넓게 대지위로 펼쳐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왕국을 침범하지 않으려 한껏 경직된 발걸음으로 최대한 빨리 벗어난다. 그들의 거만하고 교만 한 텃세에 익숙해지고, 음습하고 강력한 향기에 취해 뒤뚱거리는 고비만 넘기면, 그들의 웅장한 모근의 자태가 땅속으로 몸을 숨기고, 대신 그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흡수한 잎사귀들이 대지를 뒤덮고 있다. 물론 사각거리는 그들만의 친밀한 숨결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짧지 않은 거리를 몇 차례 오가기란 쉽지 않다.


오늘도 천사가 다녀갔다.

무성하게 뒤덮인 나뭇잎들을 누구나 원했음직한 곳에 누구나 원했음직한 정도로만 말갛게 빗질을 한, 하얀 길을 내어 놓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기분 좋은 새벽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누굴까. 늘 궁금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손잡이가 긴 나무에 연둣빛 플라스틱 솔이 달린 빗자루만 도토리나무에 기대어 있을 뿐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날은 살갗을 스치는 공기가 여느 날과 달랐다.

횡단보도 신호등도 마치 나를 위해 시간을 조율한 듯 나의 발걸음에 때맞춰 초록불로 바꾸어 주었고, 동쪽에서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은 기분 좋게 속눈썹에 내려앉고 있었다.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고, 몸놀림 또한 더없이 경쾌하고 머릿속은 유쾌한 상상에 행복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나타났다.


뿌리 깊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왕국을 겨우 벗어나서 말간 하얀 길에 막 한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옆으로 작고 하얀 발이 스쳐 지나갔다. 말간 하얀 길로 스쳐 지나갔다.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나는 이어폰의 음악을 조용히 멈추고 곁눈질로 그의 작고 하얀 발을 쫓았다. 결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작고 하얀 발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곁눈질로 그가 하는 짓을 계속 쫓고 있었다. 그는 나를 전혀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쓸어 모은 나뭇잎들을 연둣빛 빗자루로 도토리나무 아래쪽으로 빙 둘러서 모아 놓더니, 이번에는 단풍나무 아래로도 똑같이 빙 둘러서 도넛처럼 만들고, 연둣빛 빗자루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어 들고는, 천천히 또 다른 도토리나무 또 다른 단풍나무, 또 다른 잣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크기가 각기 다른 도넛 만들기를 했다.


그는 마치 지구에 그들의 행성을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온 듯했다. 행성의 크기들을 능숙하게 재단했다. 그는 온 우주에 혼자인 양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마치 우주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해오던 일인 것처럼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다는 몸짓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다했고 또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작고 하얀 발은 그의 자연스럽고 다정한 손짓에 맞추어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분명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똑바로 들 수도 그를 향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그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왔던 소행성 B612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도토리나무 아래에서 주워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둔 도토리 두 개를 손목이 으스러져라 계속 주물러대면서 곁눈질로는 그 천사를 계속 쫓고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고 다정한 몸짓으로, 마지막 단풍나무에 도넛 행성 만들기를 마치고, 연둣빛 빗자루를 단풍나무 옆 도토리나무에 기대어 놓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몸짓으로 뒷짐을 졌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는데, 뒷짐 진 오른쪽 손에는 작고 하얀 운동화와 작은 물병 한 개가 들려 있었다.


운동화와 물병에 가려 그의 손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손도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에서 온 것처럼 작고 하얀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내 곁눈질 시야에서 사라져 갈 때까지 그가 만들어 놓은 하얀 길 위에 꼼짝도 못 하고 서서, 그가 사라진 하얀 길 끝을 응시한 채, 거만하고 거대한 도토리나무의 친밀한 낙엽들 속에 몸을 내어 맡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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