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온갖 것들이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 문고리에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 있다.
안나 할머니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호박 한 개, 오이 두 개, 가지 한 개, 풋고추 열두어 개가 꼬깃꼬깃 신문지 속에서 쏟아진다.
두 해 전부터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안나 할머니의 무공해 채소들이 종종 현관에 줄지어 이르곤 했다.
사실 4년 전까지만 해도 안나 할머니는 거동조차 어려 우셨다. 음식도 못 드시고 일어나 앉지도 못했었다. 보다 못한 지인이 운동삼아 자신의 주말 농장에 데려가신 모양이다. 그 이후로 안나 할머니는 농장에서 하루 종일 사신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그렇게 주말 농장은 할머니의 건강과 함께 삶을 되돌려 놓았다.
늦둥이를 낳고 하루하루가 버거워서 비실대는 나를 보다 못한 안나 할머니는, 당신의 기적을 나에게도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주말 농장 해보라고 볼 때마다 성화셨다. 아무도 못 본 나의 위태로운 권태를 보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농사라는 것을 가까이 접해보지도 못했을뿐더러 태생이 게을러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결국, 핑곗거리가 더 이상은 무색할 때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목장갑을 끼고 안나 할머니만 의지한 채 지인과 함께 농장으로 갔다.
농장은 한 고랑씩 주인들이 다 다른 모양이다. 부지런한 주인장을 만난 밭들은 벌써 연두 빛 초록의 싹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할머니의 얼굴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와 의논 끝에, 올해는 반골만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무엇을 심을까... 막상 마음을 먹으니 이것저것 욕심이 난다. 오이 모종 4개, 고추 모종 3개, 방울토마토 모종 3개, 가지 모종 3개, 상추 모종 20개, 쑥갓 씨와 아욱 씨를 나눠 주셨다.
안나 할머니가 모종 심기 시범을 보여 주셨다. 우선 밭을 곡괭이로 흙을 뒤집어 주어야 한다. 가능하면 깊게 뒤집어야 한다. 그래야 땅이 튼튼해지고 잘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고, 허리야. 를 연발하며 우리는 곡괭이로 열심히 밭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할머니가 나누어 주신 천연 비료와 천연 거름을 골고루 뿌려 주었다.
이제 모종 심기, 먼저 오이를 한쪽 맨 가장자리에 심기로 했다. 구덩이를 간격을 맞추어서 모종이 들어갈 정도로 4개를 판다. 그리고 물을 적당히 붓는다. 물기가 잦아들면 행여 뿌리가 다칠세라 조심조심 모종을 넣고 흙을 덮는다. 그리고 줄기 쪽을 눌러주는 것이 아니라 두 마디 정도 떨어진 곳을 빙 둘러가며 살포시 아기 다루듯이 눌러 주어야 한다. 줄기 쪽을 눌러 주면 실뿌리들이 땅으로 뻗지 않고 하늘로 솟아 버린다.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다음 줄엔 방울토마토를 정성껏 같은 방법으로 심는다. 다음 줄엔 상추 모종을, 다음 줄엔 고추 세 포기를 심고, 가지는 한쪽 맨 가장자리에 심는다. 나머지 빈자리엔 쑥갓과 아욱을 심기로 하고 호미로 두 줄을 밭 끝에서 끝까지 판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파야 한다. 씨를 살살 흩뿌려가며 듬성듬성 놓는다. 그리곤 흙을 너무 두껍게도 얕게도 덮으면 안 된다. 두껍게 덮으면 여린 싹이 올라오지 못하고, 너무 얕게 뿌리면 새가 먹어버린다. 이제는 물을 흠뻑 주면 된다. 드디어 모종 심기가 끝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농장에 와서 물을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크는 오이며, 방울토마토, 가지들을 보노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나 저네나 나오기만을 목놓아 기다리던 아욱과 쑥갓이 드디어 삐죽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예쁜지 꼭 아기들 여린 손끝만 같다. 쑥갓은 반쪽만 싹이 올라와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가.
신나서 떠드는 우리를 옆 집 키가 훌쩍 큰 옥수수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댔다. 저 멀리 야산에서 뻐꾹새도 뻐꾹뻐꾹 끼어 달란다.
오늘은 상추와 쑥갓, 아욱을 뜯어 집에 오는 길에 정자에 앉아 다듬었다. 이런 게 농부의 마음이구나 싶다.
부자가 된 기분으로 행복하다.
장마다.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다. 지나치게 많다. 농장에 가 볼 수 없어 안타깝다.
끝이 안 보이던 빗줄기가 엷어지던 어느 날 찾은 농장. 전쟁터가 따로 없다. 폐허가 되어 버렸다.
오이며, 고추, 방울토마토 모든 것들이 땅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붙어 있는 건 모두 물을 너무 머금어 녹아내려 버렸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길고 긴 장마가 끝났다. 그래도 농장을 찾지 않고 있다.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 자식 같은 아이들의 상한 모습을 대하기가 겁이 났다. 자신이 없었다. 기약 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다시 찾은 농장. 우리 밭만 헤어스프레이를 잔뜩 뿌려댄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온갖 잡동사니로 엉켜 있다.
오 마이 갓! 망연자실 둘러보던 순간, 그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엉켜있는 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빨간빛이 살짝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방울토마토다. 정말 기적이다.
폭우 속에서도, 인간들도 나자빠지는 지독한 폭염 속에서도, 무심함 속에서도 살아남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울컥 올라오는 뜨끈한 무언가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조심스레 한 알 한 알 땄다. 열두 개나 되었다. 아직 푸른빛이 반 넘게 남은 설익은 것이 태반이지만 내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1등급 수확물이다.
다시 밭을 갈아엎고 있다. 땅은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으며, 더 기름져 있었다. 지렁이가 여기저기 숨기 바쁘고 땅 속의 온갖 이로운 생물들이 넘쳐난다. 비록 첫 수확은 형편없었지만 땅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별 건가. 새로운 내일이 있다는 것, 희망이 있다는 것, 우주의 온갖 것들이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도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위에는 열두 알의 방울토마토가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