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가는 길

베르테르의 노란 조끼를 닮은 은행잎들이 11월의 대학로를 쓸쓸하게 했다.

by 윤수현

지하철 2호선 혜화역 3번 출구 서울대학병원...

매주 목요일이면 별일이 없는 한 내가 찾는 곳이다. 수용미학연구회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지하 계단을 오르면 인도 오른쪽으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세월이 묻어나는 양철 쟁반 위에 찐 옥수수며 울릉도 호박엿을 파는 아주머니, 인심 좋은 미소에 마음이 훈훈하다. 그 옆으로 백발의 할아버지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군밤 몇 알과 한 움큼의 쥐포며 시골 민박집에서나 내어 놓음 직한 면도기까지 살뜰하게 펼쳐놓느라 분주하다.


매혹적인 입술을 지닌 여인 조각상을 옆으로 지나치면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빅 이슈' 오늘도 행복을 전하는 아저씨의 담백한 상술에 일 이초 간 눈길을 머금는다. 언젠가 꼭 저 잡지를 사 봐야지.


그것도 잠시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면 연탄 불 위에서 요리조리 몸을 뒤집고 있는 가래떡이란 놈에게 정신을 빼앗기기 일쑤다. 통실통실 미인형인 할머니는 오늘 운수대통인지 벌써부터 잔돈 가지고 실랑이하느라 소란스럽다. 사과, 감, 방울토마토등 과일 파는 아저씨는 신문으로 얼굴을 몽땅 가린 채 오늘은 보여주지 않는다. 신문 모서리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내려갔다. 아저씨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었다.


옆 걸음으로 조금 몸을 옮기면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서예 붓과 함께 잡다한 서적들을 파는 곳이 있다.

남편의 십계명, 아내의 십계명이 눈에 들어온다.


첫째, 생명의 요리사가 되자

둘째, 남편만의 시간을 주자

셋째, 남편을 돈 주머니로 여기지 말라.


'이런 부부가 되게 하소서. 사랑을 줄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부부가 되게 하소서.'

움직이면 돈이 생긴다고 오늘의 운세에 나와 있더니 돈 보다 귀한 正心을 가득 챙긴다.


이윽고 서울대학교 병원이 보인다. 이 지점을 기준으로 가로수가 종을 달리한다.

지하철 입구를 지나 늘어서 있는 은행나무는 베르테르의 노란 조끼를 닮은 샛노란 은행잎들이 11월의 대학로를 쓸쓸하게 했다.


꽃다발을 수줍게 한 손에 든 청년이 부지런히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손을 꼭 맞잡은 연인들,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초로의 할아버지, 왁자지껄 즐거운 소음에 한바탕 소란함을 흘려둔 채 안으로 스며드는 동창인 듯한 사람들, 우수에 젖은 중년의 노신사...

모두가 나름의 사연을 간직한 채 병원 안으로 경쟁하듯 걸음을 재촉한다.


그들의 아픔과 기적을 오랜 세월 함께 했을 플라타너스의 낙엽을 경비 아저씨가 무표정하게 쓸어 담고 있다.

족히 한 아름 하고도 반은 넘어 보이는 줄기엔 버짐나무라 불리 울 만하게 버짐 같은 껍질이 가득 차있다.

언제부터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었을까. 은행나무를 뒤로 한 채, 다시 그들의 무리를 이루기를 반복하며 서있다.


몇 걸음 옮기면 '문화게시판 stop 대학로'가 감성을 자극한다.

'김갑수가 만든 서울테러'가 시대 청년 백수 공감 1위 스토리란 부제에 젊은이들의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함께 하고, 이상우 작 늘근 도둑 이야기,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단골 메뉴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고, 성병숙의 절절한 연기가 압권일 '세상의 어머니들은 말한다. 내 가슴속 소설 한 권'의 포스터는 여지없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쉽지만 게시판을 뒤로한 채 바삐 걸음을 옮겨 옆으로 함춘회관, 함춘약국, 종로 소방서, 서울재즈아카데미, 국민은행까지 보내고 나니 '명품 녹차 찹쌀 국화빵' 포장마차가 나온다. 곁눈질로 그 고소함과 말랑말랑 속살의 부드러운 유혹을 꿀꺽 삼키고 나면 저 멀리 비어오크의 간판이 보인다.

조금 못 미쳐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어 왼쪽 오른쪽을 반복하면 드디어 수용미학연구회의 코팅된 유리문이 나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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