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외로웠고, 조금은 희망이 필요했을지도...
별들이 한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고 매우 싸늘한 새벽안개는 아직 잠들어 있는 이들의 발소리조차 낙엽 속에 섞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아직 걷히지 않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내가 애정하는 그것이 있음 직한 어디쯤에 내 시선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러면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애정은 확실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주었다. 밤낮으로 그것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바스락거리는 낙엽들 사이에서 내게 손짓했다.
나는 손끝에 내 열정을 모아 감나무 둥치아래 낙엽이 듬뿍 쌓여있는, 그것이 있을법한 쯤에 살며시 손을 넣었다. 푸른 어둠과 차가운 흙의 기운과 들이쉬는 숨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함께 떨리는 손 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만져졌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이, 황홀과 정열의 순간이, 그 찬란함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풍성함과 부드러움의 대양 속에 빠지게 하는 저 말랑말랑한 속살들의 향연, 통통하고 묵직한 정열적인 색감과 자태의 교태로움, 김 빠진 감상 따위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모양이 일그러진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한쪽 귀퉁이가 찌그러진 채 내게 미소 짓는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라고 다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일그러짐에도 진심이 담긴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마음속으로 열광적인 공감이 솟아올랐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공감을 요구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을 내 손안에 가져오기만 하면 되었다. 푸르른 새벽어둠이 밝게 쏟아질 때, 들어낸 그 자리에 감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낯선 도시에서의 부자연스럽지만 결코 수치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삶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 후, 우리 가족이 찾아든 낯선 고장. 이곳은 도시의 번잡스러움과는 또 다른 느려터진 번잡함이 소리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익숙한 세계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상황과,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무력감, 물에 젖은 솜덩어리 같은 권태 속에서 숨이 막혔다.
계속적이며, 공개적이고, 극단적인 단조로움이 내 주위를 에워싸고, 낯선 침묵들이 사춘기 내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더해가며 채워갈 때, 감나무가 들어찬 뒤뜰의 낙엽과 땅속에 반쯤 박혀있는 작은 바위들 틈 사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잘 익은 대봉시는 뜻밖의 생기였고, 한 입에 들어온 삶의 기쁨이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말랑함의 감촉과 달콤함의 향연은 단조로움 위에 분사된 샤넬 NO.5였고, 그 어떤 언어로도 어떤 아름다운 색채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햇빛이 투명하게 물든 주황빛 과육, 살짝 흐물거릴 정도로 잘 익은 달콤함, 턱끝에 맺히는 점성 있는 단맛, 맛본 순간만큼은 낯설고 막막한 새 삶이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달콤한 게 있구나 했다.
어른들의 무거운 걱정들은 말하지 않아도 공기처럼 스며 있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서 감당하기 벅찬 변화들을 견뎌야 했다. 아름답기만 한 들판은 빛을 잃은 듯 회색으로 보였다. 그 시절의 나는 조금은 외로웠고, 약간의 희망도 필요했던 것 같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한다. 나 또한 그랬다. 안집 할머니의 무해하지만 괜한 죄책감을 유발하는 눈길을 피해 새벽잠행을 결심했을 때, 결코 상상력이 부족한 공복감 때문에 결심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공복감이 없는 상상력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수단은 정당화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품어 온 새벽잠행의 대봉시는 내게는 아주 은밀한 빛 같은 존재였고, 작은 기쁨이었다. 마음속 서랍에 천천히 쌓이면서 나를 버티게 해 주었고, 나만의 세계를 조금은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제보다는 조금은 괜찮은 오늘을 선사했다.
지금도 늦가을만 되면 꿈에 푸르스름한 새벽 뒤뜰에서 잘 익은 대봉시를 찾는다. 그 시절의 새벽기척을 떠올린다. 작은 편린들로 각인되어 있는 강렬하고도 아름답게 빛났던 달콤함이라는 감정의 형태는 마음으로 느끼는 맛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입맛이 아닌 마음맛으로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여전히 그 순간의 삶을 지탱해 준 작은 기적 같은 달콤함을 찾아, 늦가을만 되면 가장 근사치에 가까울 주문창에 클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인간이라도 그 생은 한 권의 소설책이라고 하는데, 자신을 소멸시켜 어린 나의 삶에 희망을 주었던 그 대봉시는 나에게는 베스트셀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