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거나, 사라진 두 우물에
관한 이야기

못써도 괜찮아, 100살까지 글쓰기 프로젝트 8화입니다.

by 윤수현

뒷마당 한쪽 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던 그 자리에 우물은 세상의 중심처럼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사월의 바람이 스치면 라일락 꽃송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고, 보랏빛 꽃잎 몇 장이 물 위에 내려앉는 순간, 검푸른 수면은 작은 우주가 되었다. 오후가 되면 보라색 라일락 빛깔로 물드는 그 우물을 12살 나는 사랑했다. 동그랗게 번지는 파문 사이로 하늘이 일렁이고, 그 위에 스민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빛이었다.


달빛이 우물 속까지 가득 차오르던 무더운 여름밤, 공기는 숨 막히도록 뜨거웠지만, 돌담으로 둘러진 우물가만은 이상하게도 서늘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물줄기, 심장까지 시원하게 식히는 감각, 숨이 멎을 듯 차가우면서도 살아있다는 기쁨이 또렷해지는 순간, 달빛은 물방울마다 매달려 작은 별처럼 반짝였고, 나는 잠시 여름밤의 중심이 되었다.


모양이 온전치 않은 돌조각들과 푸른 이끼들의 조화로움은 묘하게도 가장 순수하고도 안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묘한 안식을 느꼈다. 멍하니 서서 우물 안 벽에 달라붙은 기이한 식물들과 바닥에서 기어올라오는 온갖 서늘한 기운들,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물의 소리는 미세하고 섬세한 모든 동작들을 하나로 합쳐서 들판 위에 서있는 고대 로마의 고독한 신전처럼 완전한 형태의 의미와 존재를 뿜어내며 서있다. 그 옆에 존재하는 나 또한 그 순간만큼은 어떤 현기증 나는 투명한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부지불식간에 당한 고통에 한이 맺힌 외로운 생명이 머무는 곳, 언덕 위에 유용하게 서 있는 거대하지 않으며 주인을 닮아 소박한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존재가 스며있는 곳, 무수히 많은 근원적인 물음표가 스며있는 곳, 죽은 사람 그가 산 사람들을 증인으로 삼는 곳, 그대를 덮고 있는 땅의 흙이 부디 가볍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일렁이는 곳, 그가 여기에 있을 수도 여기에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곳, 황폐하고 먹먹했던 과거, 오직 침묵만으로 버티고 버텨내어 결국에는 의미를 되찾아 내고야 만 곳, 영월의 단종 묘 장릉 그곳에 영천이 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샘이라는 뜻을 지닌 우물.

그 무수히 많은 희망들 위에 텅 빈 공백을 만들어 시간이 멈추어 있다.


봄이면 연둣빛 잎이 수면 위에 어리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햇빛을 가려 우물은 더욱 깊어 보인다. 가을엔 낙엽 한 잎이 떨어져 파문을 만들고, 겨울엔 얇은 얼음 아래로 샘물이 숨을 쉰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처럼 소리 낮춘 소나무 숲과 바람은 화려한 왕릉의 장엄함보다 소박한 엄숙함으로 어린 임금의 곁을 지킨다.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어린 임금의 창백한 외로움을, 삶과 죽음의 어떤 간격과 황폐함을 지키려는 충절로 단단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어린 임금의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일렁였다.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이 층층이 내려앉은 우물.

왕릉은 위로 솟아있고,

영천은 아래로 고여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하고,

또 다른 하나는 땅속을 향한다.

영원을 암시하듯 어떤 간결함을 지닌 가장 모호하지 않은 형체.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우물은 이제는 자리조차 또렷하지 않다.

돌담이 둘러 쌓였던 둔덕은 허물어지고, 라일락이 서있던 자리엔 잡초만이 바람에 마른 소리를 낸다. 달빛이 내려와도 더는 흔들릴 수면이 없고, 향기가 머물 자리도 없다. 시간도 장소도 잊어버린 채 황폐한 고독만이 자리한다. 더 이상 과거라는 우물은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아도 소용이 없고, 돌을 던져보다도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직 땅과 하늘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자체로 아름답다.

망각 속에서 자꾸만 끄집어내던 황폐했던 시간들과, 불안한 손짓으로 흔들어 대던 궁핍하고 은밀한 외로움을 움켜쥔 우물은 수면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 땅 속 깊은 곳의 문을 열고 마침내 어린 임금의 한을 봉인해 버렸다. 이제 기억 속의 폐허는 서로 대조되는 모든 것들을 돌려놓고, 영천의 반짝이는 수면 위에서 지극히 아름답게 빛날 뿐이다.


퇴색했던 하늘빛은 짙은 녹색의 풍만함으로 빛나고, 황폐했던 무덤의 고독은 태양도 제 그림자마저 품어 찬란히 빛나는 황홀한 빛을 영천의 수면 위에 투명한 빛으로 뿌려 놓았다.


어린 임금은 배식단사의 충절스러운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의 영혼에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품었다. 영원히.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