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바꾸는 믿음
누가복음 10장, 새번역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어린 시절, 성탄절을 맞아 ‘선한 사마리아인’을 주제로 성극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는 ‘강도 맞은 사람’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땅바닥에 누워 다른 역할의 배우들이 지나가기까지, 한겨울의 등시린 한기를 몸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연기를 마칠 때까지 나는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워서, 막연히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이야기를 다르게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자’는 교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율법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꽤 공허합니다.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누가 포함되고 누가 제외되는지. 결국 정의와 기준을 묻는 질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누가 이웃인가’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단순합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이 비유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설명이나 이론을 덧붙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방향, 곧 패러다임 자체를 묻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말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생활의 문제로 드러납니다.
어쩌면 좋은 신앙은 많은 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바꾸는 데 더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 무엇이 옳으냐를 묻기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좋은 말과 가르침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강의도, 책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과 패러다임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앙에 대해, 공허한 담론을 반복하기보다 패러다임의 전환, 그리고 행동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단어는 너무 쉽게, 또 너무 자주 닳아버렸습니다. 신앙은 생각이나 주장에 가깝기보다, 오히려 ‘삶’이라는 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언가에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향을 함께 바꾸어 가는 일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 주택을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금융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마을공동체를 꿈꾸고, 누군가는 아주 작은 생활의 연결을 상상합니다. 모두 같은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이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감각만큼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가치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동의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이 생각 속에만 머물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과 신앙을 ‘충성’의 문제로 이해합니다. 나는 그 말이 참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일관된 자세로 견지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이 말은 거창한 이상을 요구하기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요청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