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전남대, 창업중심대학, 창업
전남대학교에 왔다. 전남대(창업중심대학)에서 운영하는 정부지원사업의 성과보고를 위해서였다. 나는 여수에서 태어난 연고로, 한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광주와 서울 사이에서 망설였다. 광주는 학비와 생활비가 저렴했다. 서울살이는 부담이 컸다. 광주가 나았으나 끝내 서울로 가게 되면서 부모님 어깨에 짐을 더해드렸다. 이곳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늦게나마 광주, 전남대 교정을 활보하는 모습이 낯설다.
요즘 나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다. 전남대 캠퍼스 곳곳에는 민주항쟁을 기억하는 조형물들이 있다. 민주화 세대에 대한 부채감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정직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광주에 살았다던 엄마는 계엄군을 피해 산길을 헤치며 광주에서 도망갔다고 했다.
내 유년 시절, 5·18 공원은 필수 견학지 중 하나였다. 그곳에 전시된 사진들은 무척이나 노골적이었다. 무자비한 군인들의 폭력을 고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어린 내 기억 속에는 민주화 운동보다, 사디스트적 인간의 잔인함과 묘하게 폭력을 탐닉하던 은밀한 욕망이 더욱 선명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80년 광주에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되었다던 소문이 있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교실 맨 뒤 그의 책상 유리판 아래에는 금강경이 끼워져 있었다. 과거를 참회하려던 그의 수행법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 속, 그는 하이얀 얼굴에 배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중년 신사였을 뿐이다. 만약, 그 소문이 맞다면 그도 신군부의 애꿎은 피해자였을 것이다.
한번은 전남대에 있던 교수가 내게 물었다. 전라남도 출신인 너는 왜 전남대에 가지 않고 서울로 갔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심 서울을 동경했던 이유에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모교 대학의 중앙광장에는 백마상과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는 물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나는 이따금씩 분수대 앞에 서서 무지개를 만들던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다. 하늘로 솟아오르면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질까 망상하기를 일삼았다. 오늘 걷던 전남대 교정엔 호수가 있었다. 살얼음 끼인 흙빛 물 위엔 연꽃이 있었다. 서울의 분수는 하늘을 향해 상승하고자 애썼고, 광주의 호수는 정적이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무언가 상승을 향한 운동성이 불편했고, 당연지사 능력이나 자신도 없었다. 광주의 호수를 보며 서울의 분수가 떠오른 건, 언젠가 떨어지고 말 것을 미리 깨달아버린 것이었나. 이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오늘로 정부지원사업의 최종 성과 발표를 마쳤다. 잔뜩 긴장했던 나에게 담당자는 수고했다며 덕담해 주었다. 결과는 아직이지만 얼추 사업이 끝난 느낌이 든다. 이곳과 관련된 짧은 여정이 마무리에 다다랐다. 나중엔 전남대 출신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해도 되지 않겠나 싶다. 3월이 되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품을 판매해 보려 한다. 목회자로서 내가 꿈꾸던 생활운동의 일환이다. 부디 이 여정 중에 주님이 함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