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러닝 때문에

D+179

by 태지인

82년생 김지영보다도 한살이 더 많은, 어떻게 이 나이에 자연임신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가사의하고, 어리둥절한 이일생일대의 사건사고의 원인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한다는 소리가 미야코지마에서 바다거북이 세 마리를 보고 나서 임신한 것 같다는 둥,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의사쌤이 이 날 착상했다고 하심


하지만 내가 임신 전, 분명 그 이전에는 안 하던 행동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러닝‘이었다.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몇 초 안 남은 때나,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뛰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전국적인 러닝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 트민녀인 나는 단순히 트렌드를 쫓아 러닝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없어 보이는 시작이었지만 러닝의 만족감, 성취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빨리 걷는 것도 힘들던 내가 슬슬 뛰기 시작해서 백 미터, 이백미터, 그리고 1킬로, 2킬로 점점 거리를 늘려갔다. 숨찬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가급적 천천히 뛰었다. 속도로 치자면 아마 보통사람들 빨리 걷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효과를 느꼈다. (사실 이미 난 슬로우 조깅을 실천하고 있었던 거였다!) 폐활량이 좋아지고, 전신에 근육이 붙고, 게다가 살도 빠졌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래 다닌 요가원 원장님한테도 내뱉고 말았다. ‘원장님 요가보다 러닝이 더 건강해져요.’


후에 어느 tv프로에서, 난자냉동을 준비 중인 연예인이 과배란주사를 맞으면서 빨리 걷기 운동을 무조건 병행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이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남들 빨리 걷는 속도로 달려서였구나. 그랬구나. 러닝 때문이었구나.’


왜 러닝을 했을까. 도대체 왜 평생 안 하던 러닝을 굳이 그때 했을까. 아, 회환의 러닝이여.



산후 75일부터 걷기 시작했다. 8월 한여름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였지만, 나와서 트랙을 도는 것이 계속 아기를 안고 있는 것보단 덜 힘들었다. 운동을 위해 따로 옷을 갈아입을 사치 따윈 없었다. 어깨에 아기토가 묻어있는 티셔츠차림 그대로, 집에서 애기보던 복장 그대로, 추노머리 그대로, 트랙을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마침내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다.


뛰다 보니 고관절이 아프기도 하고, 발바닥이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종종 러닝은 명상이 되어, 나를 온전히 나로 있게 했다. 초고령산모가 되었던 것도 러닝 때문이었고, 다시 오롯이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러닝 때문이었다. 그렇게 육아가 힘들어질수록 러닝이 점점 중요한 일과가 되어갔고, 첫 10킬로 마라톤을 완주하게 되었다. 천천히 뛰긴 했어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산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 맛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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