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왜 기차에 뛰어 들어야 했을까.
리뷰를 쓰기 무척이나 망설여진다. 이 소설이 던지는 많은 질문은커녕 스토리도 모두 따라가지 못한 수준인데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망설이는 사이 책을 덮던 때의 감동과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마음 속에 떠올렸던 몇가지 생각도 허술하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마저도 쓰지 않고 넘어가면 더더욱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 간단하게 기록해 보고자 한다.
감히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야기하자면,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러시아 사회의 상류층 부인인 안나가 아들 세료자와 고위 공직자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버리고 잘생기고 젊은 귀족 브론스키와 함께 살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결국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하나의 줄기로는 사교계나 도시적 삶, 신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이며 시골에서의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레빈이라는 귀족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 키티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고 이후에 죽음에 대한 경험 등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목은 '안나 카레리나'이지만 작가가 결국 독자에게 던졌던 질문과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는 인물은 레빈이다. '안나 카레리나'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삶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독자들이 감정을 통해 깨닫도록 보여준다면 레빈의 논리와 치열한 고민은 독자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요구한다.
안나의 이야기와 레빈의 이야기는 영향을 크게 주고 받지 않으며 진행된다. 안나의 오빠가 레빈의 친구이고 또한 안나 오빠의 처제가 레빈과 결혼하는 키티이기는 하지만 안나를 둘러싼 갈등과 레빈의 갈등은 긴밀한 연관이 없다. 사실 안나의 이야기는 불륜과 혼외 임신, 자식과 남편을 버린 여자, 자살 등 강렬한 충격을 주지만 레빈의 이야기는 진지하지만 덜 흥미롭다.
톨스토이의 정치, 종교, 결혼, 예술에 대한 사상을 집약한 소설로 평가받지만 서로 관계를 주고 받지 않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한 작품 속에서 함께 전개시킬 이유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과 불만이 솟아 오르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 평론가 '라친스키'는 소석의 구조적 결핍에 대해 지적한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웅장한 테마 두 개가 나란히 전개될 뿐 '안나 카레리나'에는 전체 소설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연결되지 않는 두 이야기를 나란히 전개하였느냐라는 이 질문은 나에게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간단히, 유치하게 말하자면 나의 경우에는 레빈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 말하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쁜 예'로서 안나와 안나의 주변 인물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쁜 일상 중 잠깐 틈날 때 이 소설을 펼치게 만들었던 것은 역시나 강렬한 자극과 이어질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최근 흥미롭게 본, 사실 거의 유일하게 최근에 본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비교하는 맛도 있었다!) 사실 레빈이 고민하는 여러 문제들보다 불륜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나의 이야기가 막장이 되지 않는 것은 안나와 안나의 남편, 안나의 불륜남이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같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어떠한 행동에 대한 결정이나 심리, 태도가 매우 설득력있게 보이며, 인물 하나하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입장에 공감하게끔 그려진지고,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를 내내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 줄짜리 스토리만 가지고는 이 소설이 왜 명작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안나는 사랑하는 아들과 건전한 남편을 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사교계에서의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그렇지 않은 척하는 위선적인 다른 부인들에 비하면 나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
아내인 안나가 브론스키와 밀회를 즐기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지킬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에 대해 환멸을 품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브론스키가 안나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때쯤 안나가 자신의 눈 앞에서 남편만을 찾고 심지어 그 남편이 관대하게도 자신을 용서했을 때 그가 수치심에 자살하고자 한 것은 솔직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모든 것을 버린 안나의 지나치게 의심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과 같은 열정을 잃어가는 그의 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그가 한 가정을 파괴시킨 불륜남임에도!)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가 고작 근거없는 예언을 하는 랑도에게 자신의 이혼 문제 결정을 맡기는 모습마저도 그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작가가 어느 편인지 숨긴 채 인물 하나하나의 섬세한 감정과, 그들의 성격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자는 인물들에 대해 공감하는 한편 갈등 속에 있는 두 인물 중에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를 결정하도록 요구받는다. 안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으므로 무죄인가, 알렉세이는 종교의 힘으로 안나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니 종교는 과연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브론스키가 안나를 선택한 과정에 모조리 사랑만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안나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 과연 브론스키는 자신의 직책과 지위, 명예를 모두 버리고 안나와 살겠다는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렉세이의 종교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 무엇하나 뚜렷하게 답하기 힘든 질문들이 사건의 전개 내내 등장한다.
농노제 폐지에 대한 부정적 견해, 민중 교육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비판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아무리 명작이라도 우리가 다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레빈은 농노제 폐지가 농업 기술, 효율성 측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젬스트로와 같은 귀족의 사회적 역할, 민중의 교육에 대해서도 궁색한 이유( 젬스트로의 경우엔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이유, 민중 교육에 대해서는 현재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몇가지 더 있다. 나의 경우에는 지주와 농부가 노동의 결과로 얻는 수입의 차이가 불평등한 것이 아니냐는 스테판의 질문에 대해 '농부와 나의 차이를 벌리지 않으려는 소극적 행동'으로 정의를 위해 노력한다는 대답이나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농부에게 땅을 줄 수 없는 이유는 '토지와 가족에 대한 의무'때문이라고 하는 데 있어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스테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거야, 친구.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현재의 사회구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든가, 나처럼 자신이 부당한 우위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누리든가 말이야
'토지와 가족의 의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 물려 받은 시점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냐의 문제가 생길 것이고 태곳적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판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솔직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나누어 가진 권력과 부가 정당하게 나누어진 것인가, 권력과 부를 유지하게 하는 사회의 법률, 시스템은 정당한가? 우리는 언론에서 기득권들이 그것이 정당하며 따라서 지켜야 하는 권리라는 주장을 매일 접한다. 세금 문제와 임대료 문제, 최근에는 부동산 관련 정책 등이 기득권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을 때 그들은 '우리의 권리는 정당하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정말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정당하지 않지만 대중에게 이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속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다시 말하면 '부당한 우위에 있음을 알면서 누리는' 태도에 대해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실 정당하지 않은 자신의 지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정당한 것이라고 대중을 속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내가 운 좋게 부자로 태어났는데 평범한 수준의 경제력만 남기고 남에게 다 내놓지 않았다고 도덕성이 낮은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운 좋은 부자의 재산을 사회에 나누는 강제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레빈에게 다행인 것은, 도덕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또 그 시대에 비추어서는 관용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와 시대를 진보하게 만들 힘이 있다는 것이다. 솔직한 스테판보다 모순이 있지만 정의롭고자 하는 레빈의 존재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질문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결국 이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나는 읽었다. 이 질문은 언뜻 이질적이고 무관해 보이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하는 주제의식이다.
모스크바, 도시, 사교계, 정치, 사치의 삶과 농촌, 절제, 노동의 삶. 레빈은 후자의 삶 속에서 전자를 비판한다. 일부 그의 사상에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대체적으로는 레빈의 삶이 훨씬 건강하게 느껴진다. 그랬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그려지는 레빈을 보며 '신'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도 줄곧 동의하며 읽는다. 더군다나 안나의 남편인 알렉세이는 종교(그리스도)의 힘으로 안나를 용서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지만 이내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처지, 말하자면 사회적 시선을 극복하지 못하여 관용이라는 본래의 마음을 잃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종교가 주는 힘의 한계와 위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말이다.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기차에 깔려 죽는 누군가를 목격하는 사건, 레빈 형의 죽음, 안나의 자살, 레빈이 아내의 출산 중에 느끼는 죽음의 위협이라는 사건 등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생각하라는 집요한 제안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삶이 허망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레빈은 부유하고 선량한 농부 '플라톤'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그래서 사람은 제각각이라고 하나 봅니다. 자기의 필요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미추하처럼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도 있고, 포카니치처럼 공정한 노인도 있으니까요. 그분은 영혼을 위해 살지요. 그분은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기억하나?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건데?"
레빈은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누구나 알듯 진리에 따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거지요..."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레빈은 이어서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이성적인 존재로서 자기의 뱃속을 채우는 것 외에 달리 살아갈 수 없어. 그런데도 갑자기 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표도르가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진리를 위해,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
(무엇이 선한 것인가에 대한) 지식은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어. 그 지식은 이성을 초월해 있고 어떤 이유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결과도 가질 수 없어.
...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과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무신론자였던 레빈의 이러한 변모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급기야 레빈은 자신이 믿음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그 믿음을 갖지 않았다면,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자신은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다. 이어지는 레빈의 사유의 과정은 굉장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신을 위해 산다는 것, 영혼을 위해 산다는 것, 선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은 오랜 고민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애매한 느낌이 든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레빈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설득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안나'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안나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안나가 자살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안나가 가는 길은 브론스키와의 관계가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고 남편의 경고에도 관계를 계속 했으며 임신까지 한다. 임신한 아이를 출산한 후에는 자신의 아들마저 버리고 브론스키와 새 가정을 꾸린다. 안나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끼지만 영원히 브론스키도, 사교계도, 지인도 없는 유럽을 여행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다. 브론스키의 입장에서는 안나와의 관계만 남은 그 시간, 안나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행복을 느낀 그 시간이 괴롭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불행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안나에게 브론스키는 있지만 사교계에서 안나는 완전히 외면받는다. 사회적 존재로서 완전한 배제.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 이제 안나는 불행 속에 한 남자 브론스키만 남았다. 브론스키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브론스키를 차마 버리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을 강제로 잃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 남은 브론스키에게 버림받을까봐 불안해하고, 잃어 버린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한다. 브론스키의 입장에서도 잃어 버린 것은 너무나 많다.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하고 전과 같은 열정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 역시 '안나 하나만 인생에 남는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기에 불행하다. 불행한 안나와 브론스키. 그래서 안나의 자살이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안나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안나의 삶은 괜찮은 삶이었을까? 말하자면, 안나가 불행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안나와 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
레빈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선'은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가 선택한 삶은 '선'한 삶이 아니었다. 애매한 표현하기는 하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선택한 삶이 '하나님의 뜻'이나 '선한'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안나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삶'의 종말을 보게 된다. 레빈으로 말하면 '살인을 했을지도'모를 그런 삶의 종말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러한 삶이 불행한 결말을 늘 갖기 때문에 진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선하지 않은 삶이 얼마든지 행복한 결말로 마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한 삶이 불행한 결말로 끝맺는 경우도 무수하다. 그러나 적어도 선한 삶은 적어도 죽음 직전,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안나처럼 다가오는 기차 앞에서 참회해야 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를 위해 산다는 것에 종교적 의미를 거둬내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선하게 살면 나의 마음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선하게 살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것은 레빈이 말하는 진리가 아닐 것이다. 진리란 원인과 결과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옳은 것' 그 자체가 아닐까. 나의 욕망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옳다고 느끼는 것을 실천하는 것.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삶이 있으나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까? 레빈의 메시지는 너무나 실천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구체적 방향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어쩌면, 어쩌면 확실히, 아니 아주 확실히 의미가 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이, 어떠한 사회가 진리일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의미가 있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나의 행동을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점차 나아지게 할 것이고, 부당한 우위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조금더 도덕적인 기득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도덕성을 지니라는 정서적 압력은 사회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사춘기 시절 내가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다.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어떤 삶을 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어떤 삶이 가장 가치 있는가? 진리란 각자에게 모두 다르게 존재할지도 모른다.
내 삶의 진리, 한 사회의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솔직히 말할 용기를 내는 것은 선택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내 삶에, 거대한 사회 속에서 사는 나에게, 다시 말하면 아무런 힘도 없는 나에게 무용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생각'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아주 천천히 어떤 때에는 놀랄 만큼 급하게 각자의 진리가 힘을 발휘할 것임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