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콜롬비아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1967년에 발표한 소설, 백년의 고독. 노벨 문학상을 수상학 이 작가의 소설은 두께와 제목의 무게감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마콘도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로 시작되는 한 가문의 100년을 이야기한 이 소설은,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매력을 느낀다.’에 해당한다.
책의 두께도 두께지만 이 이야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무척 많은 ‘이야기’가 쉼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무려 6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마콘도라는 지역에서 펼쳐지는 이 가문의 부흥과 쇠락의 역사는 몇몇 인물의 주요 사건과 큰 줄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나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아울렐리아노 바빌로니와 같은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외의 많은 다른 인물들이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개성적인 캐릭터와, 강렬한 사건들은 큰 줄기로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모두 읽은 후에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상징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상상력의 세계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가치를 품게 되는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아내 우루슬라와 살기 위해 마을의 청년들과 함께 찾아온 땅, 마콘도는 외부와 단절되었으나 이상향처럼, 완전한 세계처럼 보인다. 이 곳은 아직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고 풍요로운 곳이다. 집시들이 와 사진기나 얼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외부인의 진정한 유입과 그로 인한 첫번째 균열은 정부가 파견한 시장으로부터였다. 모든 집을 파란 색으로 칠하라는 정부의 지침은 자족적인, 작은 공동체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마콘도에 대한 첫번째 침입이다. 그에 대해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강렬하게 거부하지만 그것이 마콘도를 영원히 보호하지는 못한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보수파’가 저지르는 부패와 잔인함을 목격한 후 ‘자유파’로서 참전하고 수십 번의 전쟁에 참가한 것,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되고 그 시체가 열차에 실려 버려지는 것을 목격한 것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세계가 외부의 침입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전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방에 처박혀 은물고기를 만드는 일에만 빠져들고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바나나 농장의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신변의 위협만 남았음을 느끼자 평생 방 속에서 양피지의 글만을 읽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사회와 현실이 작은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고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매력은 사회, 현실 문제를 비롯하여 어떤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평가, 관계가 전개되어가는 양상, 심리와 성격을 신비스럽게, 그래서 충격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집시들이 가져온 날아가는 양탄자로 시작하여 참전 중 수많은 여성들과의 잠자리로 얻게 되는 17명의 아들, 이 아들의 이마에 영원히 새겨지는 십자가 무늬와 그것을 증거로 당하는 죽음, 흙을 파 먹는 레베카, 온갖 관념과 인습을 초월한 백치 미녀 레메디오스의 승천, 죽음을 앞두고 손바닥보다 더 작아지는 우루슬라...... 신화적 서술은 당연히 ‘황당한 사건 하나’가 아니며 ‘상징’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작가가 쥐어주었거나 숨겨둔 하나의 답을 찾아가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작가의 생각에 자신의 해석, 견해를 더해 완성된다.
구습에 얽매인 페르난다와 백치에 가까운 레메디오스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사랑과 양심이 없는 카톨릭이나 문명이라는 것은 무지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가. 레메디오스의 승천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우루슬라가 손바닥보다 작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것은 오래된 세대에 대한 후세의 태도를 보여주는 걸까 오래된 세대의 종말을 보여주는 걸까,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행하는 사치와 기행은 도덕의 타락일까 고독의 몸부림일까.
너무나 많은 질문이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그 질문을 모두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므로 몇 가지만 떠올려 본다.
결코 빠질 수 없는 질문은, 근친상간이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는 가까운 친척으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두려워 우르술라는 밤이면 정조대를 차고 관계를 하지 않았다. 호세 아르카디오는 의붓동생 레베카와 부부가 되고 아마란타도 조카인 아우렐리아노 호세와 깊은 관계 직전까지 간다. 실제로 혈연 관계 사이에 성관계에 이르는 것은 마지막 세대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아마란타 우르슬라로 이모와 조카관계이다. 그리고 그 결과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난다. 출산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아마란타 우르슬라와 불개미의 먹이가 되는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 아우렐리아노.한 가문의 완전한 쇠락은 근친상간이 도덕적 타락이고, 그 타락의 결과로서의 징벌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근친상간이 이 가문에서 반복되고 있었으나 정작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탄생하는 마지막 세대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아마란타 우르슬라는 본인이 이모와 조카 관계임을 알지 못했고 ‘진정한 사랑’의 관계였음이 강조된다. 이들의 사랑은 무척 뜨겁고 진실하게 그려진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근친상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성관계가 여럿 등장한다. 형제인 호세 아르카디오와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한 여성과의 성관계로 각각의 아이를 낳았고 쌍둥이 형제인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도 한 여성과 성관계를 이어갔다.
근친상간은 내부인들만의 세계라는 점에서 마콘도와 닮았다. 마콘도가 라틴 아메리카, 더 작게는 콜롬비아의 역사를 보여 준다고 한다면 부엔디아 가문은 마콘도를 마콘도는 콜롬비아를 콜롬비아는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한다.
마콘도라는 세계는 소수의 친밀한 사람들끼리 형성한 완전한 세계였다. 그 세계는 집시와, 시장, 정부 정책이 침입하며 균열되기 시작한다. 외부의 침입으로 균열되는 것이다. 그 균열은 부당하고 내부인을 파멸시키는 것들이다. 바나나 농장에서의 노동자들의 학대, 급기야 항의하는 그들의 아이와 노인까지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사실은 은폐하는 것 등은 외부의 침략이 그와 무관하게 살아가던 한 세계를 어떻게 붕괴시켜가는지를 보여준다.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이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실패하고 그 실패의 결과 처절한 고독 속에 침잠한다.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에 대해 우르슬라는 사랑이 없는 사람, 자존심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나는 이 인물에 가장 애정을 느낀다. 그는 이웃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와 무자비한 대우에 ‘당신들은 인간 백정이군요.’와 같은 말로 참전을 시작한다. 또한 자유파로서 보수파와 굴욕적으로 협상할 때엔 결국 자신이 전쟁해온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이 전쟁을 끝내는 것 외에 답이 없음을 아프게 느낀다. 그가 참전한 이유가 단지 ‘자존심’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키려던 자존심은 정의와 선량하고 친밀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지켜볼 수 없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자존심을 위한 그 긴 싸움의 결과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은물고기를 만드는, 외부의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순하고 내면의 세계에서만 머물 수 있는 일에 빠져든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역시 바나나 농장 학살 사건을 목격하고 그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외부에 대해 저항한 결과로 17명의 아들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평생 숨어 살며 자신만의 세계에 살다가 죽는다.
외부의 세계에서 좌절한 개인이 찾는 곳은 동굴이다. 나는 좌절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외부의 활동에 부담을 느낄 때가 많다. 나의 가장 친밀한 몇몇 사람들과의 공간에서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고 세상 문제나 일상의 의무도 모두 잊을 채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솟아날 때가 많다. 그래서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에 공감을 느낀다. 그들이 겪은 좌절이 우리 앞에 있었다면 우리는 모두 동굴 속에서 그들처럼 머물고 싶지 않았을까.
근친상간은 가장 친밀한 사람들끼리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늘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나올 위험 속에 있다. 이 가문 속에서 마콘도 사람이 아니며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이고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은 바로 명백한 외부인인 페르난다이다. 페르난다는 외부인으로 이 가문에 들어오며 융화되지 않고 오히려 가문의 분위기를 바꾸어낸다.
-신화적인 사건과 상징은 실은 콜롬비아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내부인들만의 완전한 세계 마콘도와 근친상간의 아우렐리아노 가문은 운명을 같이 한다. 가장 친밀한 사람들의 세계에서만 머무르는 것은 근친상간이 그렇듯이 위험하다. 외부와의 교류, 혹은 외부에서의 침입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 많은 사람들과, 특히 중남미의 많은 독자들이 호응했다면 그들은 비슷한 경험과 모순과 소망을 공유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만약 일제 시대 전후 무렵의 우리가 읽었다면 더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현대적 질서나 공권력의 정립, 콜롬비아 내전과 미국 자본주의 질서의 상징인 바나나 농장과 같은 외부의 자극은 오래 전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왔던,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는 한 가문, 문화권, 국가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홍수’는 그 폭력적인 외부의 침략을 몰아낸다. 홍수로 인해 바나나 농장 사업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콘도의 쇠퇴를 가져오기도 한다. 홍수는 바나나 농장 이전의, 콜롬비아 내전 이전의 마콘도를 되찾아 주지 못한다. 다시는 이토록 고독한 가문이 시작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 소설의 마지막 예언처럼 다시는 이와 같은 마콘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도 흙을 파 먹고 사는 레베카처럼, 사실은 두려움에 약혼자와 파혼하고 그 약혼자의 죽음에 자책을 느끼며 스스로 화상을 당한 아마란타처럼, 사치와 기행을 일삼던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처럼 어떤 것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신화, 상징과 질문이 가득한 이 이야기 ‘백년의 고독’은 수많은 질문과 충격적인 상징, 보편적인 정서와 역사가 가득하니, 함께 독서할 누군가가 있을 때 훨씬 즐거울 소설이다.
독서 경험의 공유와 정서적 교류가 무척 간절해지는 책. 백년의 고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