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편견에 동의할 수 없었던 청년이 느낄 수밖에 없던

by 쉼표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속도감 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게 푹 빠져 읽은 소설이다. '백년의 고독'에서처럼, 어쩌면 이렇게 글이 말 그대로 '물 흐르듯' 쓰일 수가 있을까,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 이야기 자체가 억지스러운 상징이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고 인과 관계에 트집 잡을 것 없으며 좋은 소설이 그렇듯, 큰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


이야기의 큰 줄기


소설의 주인공 '마크'는 유대인인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정육점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도 학업에도 충실하고 '가장 착실하고 얌전한' 여학생들과 공부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제한된 일상에서 충분히 자유로움을 느끼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청년이다. 걱정하거나 안달낼 것 없이 잘 자라고 있던 이 청년 '마크'를 자살 시도를 한 경력이 있는, 부모가 이혼한 여자 친구 올리비아를 만나 그 아이를 임신시켰다는 오해를 받고, 학생 과장과 기숙사 배정 문제와 종교 수업(채플) 문제로 설전을 벌이고, 채플 수업을 거부하여 끝내 퇴학을 당하는 '마크'와 함께 세워 둔다면 당신은 고개를 갸웃거리겠는가.


'불안'과 '종교' '사회적 규칙'과 '자유'

-비합리적인 것들에 편입되도록 강요 받는 이성적인 개인과 그것을 거부한 청년이 느끼는 '울분'


이 소설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착실하기 그지없는 마크를 두고 평생 성실하고 건강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의심하고, 화를 내고, 책임을 전가한다. 아무런 일탈도 하지 않은 마크가 어쩌면 당구장에 갔고, 매음굴에 가서 타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생각을, 상상을 끝없이 한다.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문을 잠가 아들을 혼내고 가르치려 한다. 마크는 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다.



"어디 갔었느냐? 왜 집에 없었던 거냐? 네가 나가서 어디를 싸돌아다닐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라고 묻는 아버지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는 집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편입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올리비아 허턴과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의 남자 아이가 여자 친구와 나누고 싶은 스킨십을 시도하며 아무런 전투도 겪지 않은 그날의 차 안에서의 데이트로 그의 혼란은 시작된다. 올리비아가 1951년의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성적 욕구'가 없지 않다는 이유로, 심지어 자신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여자 스스로가 원해서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성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크는 그녀를 피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관습에서 벗어난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여 '부모가 이혼하여 그런 것'일 것이라고, 이전에도 그런 성적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습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들


관습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와 비합리적인 감정. 올리비아 허턴이 마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그 일을 지나쳐 그 상태 -사회화된 개인, 관습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크에게 올리비아는 그렇게 지나쳐버릴 수가 없는 아이였다.




우리는 대부분의 관습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남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은 어쩌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때로는 전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 이성적이기까지 한 일일지라도 사회적 질서와 보편에서 어긋난 것이라면 우리는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올리비아 허턴의 성적 행위와 욕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은 성적 욕구가 없다는 1951년 미국의 사회적 인식에 비해 이성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마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기에 이른다. 만약 그 대상이 올리비아가 아니었더라면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상은 올리비아였다. 우리가 비합리적인 관습이 우리와 관계가 없을 때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올리비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행동이 관습에서 어긋났다면 마크도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나치지 않음'으로 마크는 성장한다.




그러나 관습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회적 관습에서 어긋났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더구나 그가 다수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 아닐 때 그는 더 많은 오해를 받고 그것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마크는 유대인으로 입학 원서에 부모님에 대해 '유대인이 운영하는' 정육점이라는 정보를 누락했다는 이유로 학장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작성했는지를 계속 추궁받는다. 미국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였을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 '문제적 인물'로 마크는 이미 학장에게 낙인 찍힌 것이다.


소수 유대인인 마크는 미국 열심히 공부하여 A학점을 받는 동시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야 하는 마크가 수면을 방해하는 룸메이트를 피해 방을 바꾸고, 새로운 룸메이트가 올리비아 허턴을 모욕해 다시 방을 바꿨다는 이유로 마크가 학생과장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사실 이 소설의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학생 과장은 유대인인 마크가 방을 2번 바꾸었다는 이유로 주변 환경, 나와 맞는 않는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이루는 그가 '문제가 있는' 개인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와인스버그 대학으로 편입한 이유가 아버지의 불안과 다금침을 '참지 못한' 것이었음을 문제 삼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합리한 누군가와 사는 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견디어야'하고 '참아야'한다. 그것이 학생 과장의 주장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불합리를 참지 못하는 것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졸업에 필수적인 '채플'(종교 수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무신론자에게마저 체계화된 종교의 관행과 믿음을 강요하는 일을 참지 못하는 마크는 '사회화된' 인간으로서의 학생 과장의 시선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말 마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 불합리하고 편견에 가득차 있어도 거기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라면



나는 이 작품에 대한 리뷰를 검색해 어떤 이가 학생 과장과 비슷한 이유로 마크에 대해 저평가하는 글을 읽었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불합리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적응해 살아야 한다. 일단 살아남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는가. 개인의 힘으로 당장의 이 모든 편견에 맞서기엔 승산이 너무도 낮다. 또한 관습과 편견은 어쩌면 오래된 사회적, 역사적 경험의 지혜가, 지혜까지는 아니더라도 효율적으로 사회가 지탱되도록 한 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합리가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우리는 참아야 하는 것인가 바꾸어야 하는 것이가.


불안과 비이성의 관계

-아버지는 왜 이성을 잃었을까,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


왜 인간은 (적어도 마크의 시선에서는 불합리한) 종교적 믿음을 갖게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왜 마크의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건강하던 모습을 잃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온몸을 떨며 비합리적인 상상-마크가 죽고 말 것이라는-속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라는 물음과 이어진다.


마크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잃을까 전정긍긍하게 된 데에는 한국전쟁(6.25.) 참전이라는 당시 미국인의 공포에서 시작된다. 부모의 입장에서 세상 최고의 약자는 자식일테니 한국 전쟁의 참전으로 내 아이 또래의 청년이 죽었다거나 지인의 자녀가 죽었다거나 하는 소식을 듣는다면, 한국 전쟁에 내 자녀가 참전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코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공포에 휩싸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공포와 그로 인한 불안은 너무나 비이성적이다. 당구를 할 줄도 모르는 성실한 대학생 아들을 지인의 아들이 당구장에서 말썽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당구장에서 찾는 행위를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공포는 비이성적인 불안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이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버릴 확률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에도 늘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인 사랑에 넘치는 가정은 완전해 보이지만 한 순간 최악의 불행 속으로 빠질 수 있다. 그들이 함께 타고 가던 자동차가 사고를 당해 죽는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포에 약해진다. 상황이 나쁜 정도와 그 상황에 빠질 확률, 그리고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 어떤 상황에 대한 공포는 여러 조건에 따라 그것이 일으키는 불안의 정도를 결정한다.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19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이 글을 쓴 당시에 그랬다.) 어제 운전 중 뉴스에서 미국의 상황-뉴욕의 병원에 병실이 부족하고 사람이 너무 많이 죽고 아파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다는-을 들으며 공포를 느꼈다. 현재 나의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공포 상황에 대해 노출되고 극심하게 나빠진 상황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이 그들에 대한 연대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나 자신의 보호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마크 아버지의 공포와 비이성적인 불안은 마크를 참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대학의 채플 수업 역시 마크를 참을 수 없게 한다. 룸메이트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함께 사는 사회이니까 그저 받아들이고 참는 선택을 하지 않았듯이 마크는 종교 수업을 참을 수 없다. 단지 사회 질서, 문화적 관습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생각,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타인과 비슷하거나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인격적 결함이라는 시각을 마크는 참을 수 없다.




종교는 매우 많은 부분 공포와 불안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약한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기대고자 하는 욕망을 품기 쉬울 것이라고 짐작한다. 유사 종교는 그런 인간의 욕망을 파고 들어 결국 개인의 주체성을 잃어 버리게 한다. 그러나 유사 종교가 아니고 종교의 원래 목적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종교가 공포와 불안의 심리에 기반하여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크에게 그러한 위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럼 무엇으로 영적 자양분을 삼지? 위로가 필요할 때 누구에게 기도하나?"
"저는 위로가 필요 없습니다. 신을 믿지 않고 기도도 믿지 않습니다."
.... "저를 지탱해주는 것은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도는 허무맹랑한 짓입니다."



그러나 관습에 굴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 울분을 참지 못한 마크로 인해 역사는 진보하리라.


한 순간의 울분으로 죽음을 맞는 결과를 보여준다, 라고 평하는 글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한 순간의 울분이나 우연한 사건이나 선택으로 맞는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참아내고 룸메이트를 참아내고 올리비아 허턴을 사랑하는 것을 참아내고 채플 수업을 참아내고 학생과장의 제안을 참아냈다면, 그는 예정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며 변호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무살을 한 해 남겨두고 죽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순간의 울분을 참고 행복한 결말을 위해 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마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알랑거리는 찬송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
다시 말해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매주 수요일마다 채플에 가야만 퇴학을 안 시키겠다고 했을 때, 마커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매스너답게, 다름 아닌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답게,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두번째로 이렇게 내뱉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좆까, 씨발."





이 소설의 말미에 일어난 하얀 팬티 습격 사건은 사회적 억압에 대한 미성숙하지만 직접적인 대응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이 사건은 그것을 계기로 학생의 권리가 신장되고 채플 수업이 폐지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로 인해 관련자가 모두 처벌 받거나 퇴학된다. 실제 하얀 팬티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 사건을 인용했기 때문에 결과가 달랐던 것만은 아니리라. 관습에 대한 저항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관습에 굴복하는 것은 안전한 삶이다. 관습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공포와 불안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사회 체제에 편입할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것에 반항하고, 울분을 터뜨릴 때 어쩌면 마크처럼 인생이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던져야 할 시선이 '그러니까 관습에 복종했어야지'나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한 순간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친 인간'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혹은 순간순간 마크와 같은 울분을 터뜨릴 때 공포와 불안, 관습의 '비합리적'인 부분, '타인에 대한 배척'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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