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세상 모든 40대의 삶이나 세상 모든 여성의 삶이 없듯이 각자의 삶은 다 다른 거다. 세대 논쟁이 한참 불붙었을 때, 사실 세대보다는 계층의 문제가 삶을 결정하며 세대 논쟁의 뒤에서 계층의 문제가 흐릿해진다고 걱정하던 글을 읽었을 때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사람의 삶이 같을 수 없고 어떤 삶의 조건에 처했느냐가 그 사람의 괴로움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워킹맘의 삶이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든 워킹맘의 삶은 아닐지라도 어떤 이에겐 나의 삶이 '그 정도면 편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에겐 '극도로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조금씩은 공감할 여지가 더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달픔에 대한 자기 검열을 이토록 하는 것은 나의 소심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힘든 것은 나의 나약함 때문인가. 엄살인가. 극복해내려는 태도가 부족한 것 아닐까. 이런 넋두리가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러다 문득, 뭐라 설명하기 힘들고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세상사 문제를 소설 속에서 발견했을 때 비로소 명확해지며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이 넋두리는 그것이 엄살일지라도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고달품의 이유가 명확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그것은 어쩌면 위로가 될 수도 깨달음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 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우울감에 시달렸다. 단순히 일하기 싫다거나 내향형인 내가 다수의 학생들 앞에 서기가 부담스럽다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계속 되뇌던 질문이 더 자주 떠올랐고 여전히 답이 없었다.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건지 나 자신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해낼 자신.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을 한다. 아이를 학원에서 픽업해 와서 집에 도착하면 5시 30분. 배가 고프다는 아이들의 말에 마음이 급해진다. 외투만 벗어둔 채 아이들의 허기를 달랠 간식을 찾으며 아이들에게 가방을 제자리에 둘 것과, 손을 깨끗이 씻을 것, 외투를 정리할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조용히 이 세 가지를 할 리가 없다. 귀엽게도 쉴 새 없이 서로 장난을 치고 웃다가 다른 짓을 해 가며 가끔은 싸우는 듯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아침에 아이들의 식사가 치워지지 않은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출근하므로) 식탁과 전 날 치우지 못한 갖가지 물건들, 아침에 벗어뒀던 아이들의 옷가지를 보고 있으면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전혀 귀엽지가 않다. 다시 재촉하며 전 날 사뒀던 딸기를 챙긴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하므로 과자를 많이 주면 안 되니 껍질만 벗기면 되는 과자가 아니라 과일이 필요하다. 딸기를 씻고 꼭지를 따며 옷을 편하게 갈아 입고 싶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딸기를 다 씻을 때까지 첫째 아이는 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이제 이 아이는 옷을 입다 말고 책을 읽고 있다.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보들아! 너 지금 안 하면 하트(일종의 스티커 같은 거다. 이 하트를 모아야 용돈을 받을 수 있다.) 안 줘!"
라고 말한다.
"왜요? 나 다 했어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외투와 널부러진 가방을 손가락질 한다.
"아, 지금 할게요!"
하트에 민감한 보들이는 나에게 약간 화가 난 것 같다. 그 모습에 다시 화가 난다. 일단 옷을 갈아 입고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동생 꽁꽁이가 말한다.
"엄마 왜 간식 안 줘요?"
이 아이의 목소리에도 투정이 담겨있다. 나는 딸기를 먹으라고 말하고 옷을 갈아 입으러 간다. 그런데 밖에서 또 떠드는 소리가 난다. 보들이는 할 일을 다 한 걸까? 다시 거실로 나간다. 보들이는 동생과 장난을 치고 있다.
"보들아! 너 할 일 하라고."
"다 했어요."
보들이의 외투는 의자 위에 던져져 있다.
"저거 옷장에 넣으라고."
보들이는 다시 궁시렁대며 움직인다. 이제 화장실을 가야지, 하며 안방에 들어서면 아침에 미처 정리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 온다. 모른 척 하려다 몇 가지 주섬주섬 치우며 세탁실로 향한다. 이제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있다. 세탁 바구니에 옷이 가득이다. 속옷과 겉옷을 분리하고 아이들의 잘 늘어나는 옷은 망에 넣으며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는다. 그러다 또 화장실을 못 갔다는 생각이 난다.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나오니 보들이가 찬장을 뒤지고 있다.
"보들아 너 뭐해? 과자 먹지 말라고! 딸기를 먹어."
"왜요? 먹으면 안 돼요?"
"곧 저녁 먹어야 하니까 이따가 먹어."
"이미 이거 좀 먹었는데"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바닥엔 과자 부스러기와 쓰레기. 이 아이는 쓰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버린다. 그러고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다. 지금쯤 배달이라도 시켜야(오늘 요리는 생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배고프지 않겠다. 배달앱을 뒤적이며 그래도 두둑하게 먹이는 것이 좋을 거 같아 떡갈비를 시킨다. 보들이가 말한다.
"엄마 햄버거 먹으면 안 돼요? 제발요!"
나는 지금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 이제 6시 10분이지만 아직 옷을 갈아 입지 못했고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짧게 안 된다고 말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화장실을 다녀 온다. 다리가 아프지만 엉망인 집을 보고 있으려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침에 먹은 것 설거지, 집안 정리를 시작한다. 아이들의 싸우는 듯, 장난치는 듯, 뭔가 쿵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이 다칠 것 같은 상상이 든다.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며 너무나 하기 싫은 이러한 일을 잊기 위해 뭔가 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어폰을 끼고 요즘 주구장창 듣고 있는 성시경의 '너에게'를 듣기 시작한다.
너의 말들을 웃어 넘기는 나의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
너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
까지 듣는데 꽁꽁이가 온다.
"엄마 형아가 때렸어요."
레파토리가 시작된다.
주로 이러한 스토리다.
꽁꽁: "엄마 형아가 때렸어요."
나: "보들아 너 왜 때렸어?"
보들: "꽁꽁이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했어요."
나: "그래도 사람이 말로 해야지 때리면 돼? 너 엄마가 너 때려? 왜 이렇게 자꾸 험해지는 거야?" (보들이의 속상한 표정에 약해진 마음으로 꽁꽁이를 돌아보며) "꽁꽁이 너 하지 말라는데 계속 했어? 상대가 싫어하면 들어야지. 너 형처럼 착한 형이 있는 줄 알아? 형이 말하면 들어야지." (까지 말하는데 그래도 폭력의 중요성을 더 강조해야하겠다는 생각에) "보들이 너 그래도 누가 더 잘못한 거야? " (보들이가 '제가요'라고 하자)
"그래, 너가 더 잘못한 거야. 때리는 것이 더 나쁜거야. 나중에 사회에서는 때린 사람이 잘못한 거야."
까지 늘 하던 말을 한다.
이제 아이들이 해야 할 공부를 체크한다. 학기초라서 알림장도 잘 봐야 하고 써서 제출해야 할 것도 많다. 다시 이어폰을 낀다. 노래하던 성시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지금 나에겐 두려움이 앞서
너무 많은 생각들이 너를 가로 막고는 있지만
날 보고 웃어 주는 네가
"엄마"
다시 꽁꽁이가 왔다.
"(유튜브로) 음악 들으면서 녹음해도 돼요?"
"응 그래"
보들이가 온다.
"엄마 나도 해도 돼요?"
나는 다시 음악을 중지한다. 그리고 말한다. "응 보지는 말고 듣기만 해."
보들이와 꽁꽁이는 신나서 간다. 나는 음악 듣기를 포기할까 하다가 도저히 너무나 하기 싫은 이 잡다한 집안 일을, 집안일만 하는 것은 하고 싶지가 않아 다시 노래를 재생하는데
그냥 고마울 뿐이야
너는 아직 순수한 마음이 너무 예쁘게 남았어
까지 하는데 다시 보들이가 온다. "엄마 내 핸드폰 어디 있어요?"
이제 짜증이 참기 힘들어진다. 늘상 이런 식이다. 그럼에도 끝끝내 뭔가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려는 내가 정말 문제인 거겠지. 보들이의 이 "00 어디 있어요?"는 너무나 나를 닮은 것인 줄 알지만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
"니 물건 니가 찾으라고. 제 자리에 놔두고 니가 찾아야지. 꽁꽁이한테 전화해 달라고 해."
"아니 엄마가 놔뒀잖아요."
"내가 왜 니 핸드폰을 놔둬. 너 물건 없어지면 맨날 나한테 없앴다고 하더라. 나 손 안 댔어. 니가 찾아!!!"
드디어 무언가 듣는 것을 포기한다. 이제 설거지를 해야 하고, 아이들 공부를 체크하고, 샤워하라고 여러번 말해야 하고, 싸우면 판사가 되어야 하고, 학교 제출물 작성해야 하고, 필통에 연필 등을 가져오라고 하여 깎도록 시켜야 하고, 방 정리도 시켜야 하고, 밥을 먹이고, 치우고, 공부를 시키다가 그날 유독 공부 집중을 못하면 적당한 선에서 더 시킬지 말지를 결정하여 도저히 집중이 안 되겠는 상태라 판단되면(보들이의 경우) 그냥 너는 책 읽는 걸로 끝내자, 해야 하고 밀려 있는 수학 문제집 채점도 해야한다. 오늘은 시켜먹었으니 수월한 건데도 왜 이렇게도 일이 많은지. 그러다 세탁기가 일을 끝내면 이제 세탁물을 건조기에 넣을 것, 건조대에 널 것을 구분하여 널어야 하고, 나도 학기초라 학교 일 해야 할 것을 마무리 해야 한다. (학교 일과 중에 못한 것은 학교에 남아 처리할 수 없으니 집에서 해야 한다.) 그 와중에 분리수거할 것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쓰레기 봉투의 쓰레기도 넘쳐나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아, 이거였구나 싶다. 가장 힘들었던 감정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후회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일은 넘치고 어떻게든 도피하고 싶어 듣는 음악도 들을 수가 없고 일의 진행을 느리게 하는 (청소리를 돌리고 정리하는 눈 앞에서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리는 보들이의 행동처럼) 아이를 볼 때 나는 금방 한계점에 다다르고 버럭 화를 낸다. 어떤 때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화가 난다. 다리도 아프고 옷도 불편한데 쉴 새 없이 아이들은 요구하고 그 요구는 아이로서는 너무나 정당한데(배고프니 간식을 주라는 꽁꽁이처럼, 형이 때렸으니 말하는 꽁꽁이처럼) 나는 그것도 화가 난다. 저녁을 먹다가 부족한 반찬이나 밥을 가져다 달라는 요구는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해 주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많이 어떤 때는 너무 적게 먹어서 반찬을, 밥을 2~3번 뜨러 왔다갔다 하다보면 나는 더 이상 먹고 싶어지지가 않는다. 특히 소근육이 섬세하지 않은 보들이는 음식을 식탁에 옷에 바닥에 떨어뜨리고 자세가 바르지 않은 보들이가 때로 지나치게 의자를 식탁에서 멀게 두고 먹을 때, 물 컵을 식탁 가장자리에 두고 몸을 심하게 움직이며 먹을 때, 꽁꽁이가 형이 웃기다며 음식을 입에 넣은 채 계속 웃을 때,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먹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허기와 피곤과 그날따라 많은 집안일이 겹칠 때 나는 이 많은 것 중에 하나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러워져서 주말부부인 내 처지가 숨이 막히도록 답답하게 느껴져서 암울해진다.
아, 이거였구나.
이거였다.
내가 왜 화를 냈지, 나는 정말 그릇이 작구나. 나는 성격이 못 됐구나. 나는 아이들에게 또 죄를 지었구나. 하던 이 자책의 감정.. 나는 직장의 일을 집에서 하고 직장에서는 집에서의 일로 피곤한데 또 집에서는 직장의 일로 피곤하고. 이 일과 저 일을 함께 하고 있는데 어떤 것도 제대로 하는 것은 없고 하루 종일 뛰어다닌 것 같은데 양쪽에 눈치 보이는 이 심정.
아이들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그 생각만 하다가 설거지하다가 울컥, 청소하다가 울컥, 자려는데 울컥하다가 이제 '나'도 좀 사랑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드는 질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