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기뻤고 또한 이별을 겪기도 했던 ‘과거의 나’이다. 과거의 ‘나’를 ‘그’로 표현한 것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감각(느낌)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걱정’에서 ‘엄마가 안 오셔서 슬펐다.’ 대신에 어른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내 유년의 윗목’이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으로 표현하거나 ‘빈 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하는 표현과 비슷한 감각이다. 어린 시절의 ‘과거’의 나, 사랑을 했던 ‘과거’의 나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어른의 나 / 이별 후의 나 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듯한 느낌이 굉장히 공감된다. 간혹, 우리는 과거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슬프고 아프다고 그끼기 보다는 ‘과거의 나’가 너무나 안쓰럽게 느끼기도 하지 않는가.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그러나 그 기쁨과 이별들에게 ‘그’를 찾지 말라고 한다. ‘기쁨’,‘ 이별’, 한때의 순수함과 열망이 이제 다시 나에게 올 수 없으리라 단정하는 이유는 ‘내가 그리워’한 것들은 모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리라.
그 시절은 ‘지고’, 지나온 기억도 흐려져 이제 남은 건 ‘희고 둥그런 자국’ 뿐.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그래서 물은, (의미 있는, 기쁨과 이별이 있는) 시간은 굳고(정지하고). 그래서 구름들은 굶주렸다. 구름은 굶주렸으므로 결핍된 것이고 또한 굶주렸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무척 열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름은 결핍된 동시에 열망하는 존재가 아닐까? 기쁨과 이별의 기억은 흐려졌고 그래서 생명력이 있던 시간은 멈추어 버렸다. 한때의 기쁨과 사랑, 그것을 잃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갈구하는 내면적 자아를 ‘구름’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존재라는 점에서 ‘황폐한’ 나무 역시 구름과 다르지 않다. 크고 넓은 ‘이파리’는 내면적 자아를 애써 감추는 현실의 나, 현재의 나, 그러한 대부분의 인생을 표현한 것 아닐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그러나 이제 나의 열망과 한때의 기억들과 현재의 나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다. 굶주린 구름은, 간절한 열망은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그러나 이러한 ‘탄식’도 ‘희망’도 무책임하고 일생을 그르치는 것일 뿐, 의미가 없다. 자조적인 목소리이다. 체념할 것을 권하는, 이미 체념한 듯한 자세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의 이러한 희망과 탄식이 무척이나 간절하다는 점에서 또한 희망이라는 것이 결코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라는 일반적인 인식의 측면에서 ‘무책임한 탄식’,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멈칫하게 만든다. ‘탄식’이나 ‘희망’이 체념해 마땅하다고 인식하고, 의미 없는 생각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이것이 벗어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련의 감정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기형도 시에서 내가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러한 모순인 것 같다.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음을, 이런 종류의 탄식이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인식하고 있는 시적 자아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갈구하는 자신의 희망을 자조한다. 그러나 그 자조적인 태도가 역설적으로 그 희망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내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측면에서) 드러낸다.
시인의 탄식과 희망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의 탄식과 희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뻔한 인생의 진리, 세상의 진리를 알기 시작할 때 탄식과 희망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그러나 간혹은 ‘굶주린 구름’이 찾아 오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이파리’를 피워낸다. 그래서 우리는 길 위에서 자꾸만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다짐하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찾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