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by 쉼표

고등학교 문제집에도 종종 등장하는 '질투는 나의 힘'을 나름의 관점에서 읽었다. 사실, 나의 감상을 수업 시간에 전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이 시험에서 헷갈리면 안 되니까 말이다.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모두가 대체로 받아들이는 해석을 가르치도록 만드는 것이 '평가'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에게 권장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시적 화자가 전면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시적 화자의 내면(진실)의 거리감은, 바로 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로부터 시작된다. ‘힘없는 책갈피’는 기억하고자 했던 (청춘의) 기억 한쪽에 꽂혀 있다가 단념한 듯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떨어뜨’려 질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이 종이’의 내용은 아직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은 젊은 날의 나, 현재의 자아의 모습이다. ‘그때’, 즉 ‘현재’의 나는 마음 속에 많은 상념과 감정(공장)을 만들고 의미가 있는 것처럼(사실은 그렇지 아니한데, 라는 인식은 ‘어리석게도’로 드러난다) 여기며 (기록하며), 바라는 무언가, 손에 쉽게 잡히지 않은 무언가, 어쩌면 잡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무언가(구름)을 쫓아 다니는 모습(개)이다. 아직 젊은 나는 지칠 줄 모르고 구름처럼, 개처럼 잡히지 않는 무언가처럼, 잡지 못하는 누군가처럼 머뭇거릴 뿐이다.

그러니 나는 탄식밖에 할 수가 없고 청춘의 나는 손에 쥐지 못하는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를 그 누구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리라.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내 젊은 시절 내가 희망했던 것은 도저히 가질 수 없던 것들이었다고, 시적 화자는 되뇌인다. ‘질투’를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함’이라고 단정해 버린다면 자칫 세속적인 것을 희망하는 자아로 읽어버릴 위험이 있다.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이었다는 것은 화자가 갈망했던 것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그런데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는 되뇌임은 앞서 이야기한 ‘책갈피’가 떨어뜨릴 ‘이 글’을 보며 ‘미래의 나’가 할 되뇌임이라는 점에서 깊이가 더해진다.(현재의 '나'의 갈망은 고작 질투뿐임을 미래의 ' 나'가 한탄하리라는 인식, 이것이 정말 고작 '질투뿐'이라면 화자는 현재를 수정하여 미래에 한탄하지 않을 삶을 살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질투뿐'을 단순하게 '배척해야 할 삶의 태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결국 내 희망의 내용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고 거기에 더해 그럼에도 나는 이 희망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질투’가 숙명임을 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갈망하고, 결핍감을 느끼고, 그런 자신을 자조하기에 화자는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고백한다. (사랑하지 않았노라. 라는 고백을 미래에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미래의 자아의 목소리를 현재의 자아가 예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무엇인가.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닌가. 이 시는 물론 성찰적이고 반성적이다. 각종 문제집에서 설명하듯 그렇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받아들이면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너무나 단순하고 교훈적인 시로 오인될 여지가 충분하다. 제목은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닌가. 나는 이 두 가지 태도(‘질투’를 긍정하는 듯한 제목과, 질투만 하고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목소리)를 어떤 것이 진실일까, 라는 질문으로 읽지 않는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어리석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고 ‘탄식’만 낳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결핍은 자조와 비관을 낳는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망치는 일일지도 모른다.(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한들 어찌하리.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숙명(나의 힘)인 것을.




어떤 것이 행복으로 이르는 길인가, 에 대한 답은 나이가 들면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 찾아가는 것 같다. 각자에게 해결 방법이 있으리라. 오래전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이제는 30대의 학생이 나에게 인생의 조언 같은 것을 구했을 때 나는 망설였다. 내가 받아들인 인생의 지혜 같은 것은 실은 ‘나의 인생’과 ‘나’라는 사람에게 적합한 지혜가 아니던가. 그리고 실은 그 모든 지혜는 나의 마음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실은 지혜대로 살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의 피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갈망이 숙명인 것처럼 그로 인한 좌절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 역시, ‘질투’ 역시 나의 ‘힘’이라는 목소리는, 반어이거나 조롱, 또는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과 같은 교훈이 아니라 어쩌면 굉장한 긍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두에게 조금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가? 때로 치명적인 상실감은 한편으로 간절함의 다른 면이고, 이러한 간절함은 자아를 비웃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과 같은 것. 모두의 삶이 나와 같지 않으므로 단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간절함과 상실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함으로써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와 아이, 아이와 엄마의 사랑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