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 아이와 엄마의 사랑이란,

섬집 아기, 엄마 걱정, 추억에서

by 쉼표

11살 보들이와 가장 친한 남자 아이의 엄마와 일상적인 일로 통화를 하던 끝에, 심란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우리 00이 여자 친구가 생겼대.

며느리가 생기면 딸처럼 너무나 예쁠 것 같아서 자기는 아주 잘해 줄 자신이 있다고 했던 그녀였다. 아직 11살인 데에다가 아이의 입에서 '우리의 사랑을 막지 말라'와 같은 말을 들은 데에다 그 여자 아이가 예술중을 가자는 제안에 엄마를 졸라댔다 하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면서 왜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미워하는지 알겠다는데 폭소를 터뜨렸지만 그 마음 너무나 알겠어서 함께 뭔가 서운해졌다.


그래, 서울할 만하지. 그리고 그 서운한 마음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그저 우습기만 할테다. 우리는 모르겠는가. 그 과정이 성장의 과정이고 언젠가 한 번 겪을 과정이며 그렇게 인생을 배워가는 거라고. 오은영 박사님 말대로 육아의 목표는 독립이라고. 독립시키기 위해 하나씩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도 그녀에게 그렇게 위안의 말을 건넸고 그녀도 말하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고 했지만, 이제 정말 아이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어질 일이 남았나보다, 실감날 때의 그 아쉬움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도 지루해지지도 않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누군가는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이를 낳고 온통 아이로 가득차서 나의 정체성이 그냥 '아이 엄마'가 되어 버린 지난 몇 년을 지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섬집 아기'(한인현), 나 '엄마 걱정'(기형도)이나, '추억에서'(박재삼)을 듣고 읽을 때 이렇게도 슬픈 시였나,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자국 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시절,내 유년의 윗목


어린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생생해서 세 시 중에서도 나에게는 가장 가슴이 아픈 시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요즈음 '어린 나'를 떠오를 때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어린다. 이렇게 흔한 눈물을 정말이지 너무도 가치가 없다, 여기면서도 '작은 키의 나',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남겨져 있던 나'를 떠올릴 때면 너무나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 그 '어린 나'를 보는 '마흔이 넘은 나'의 시선은 '한때 내가 그렇게 힘들었는데.'하는 감정이 아니다. '어린 나'와 '마흔이 넘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마흔이 넘은 나'가 '어린 나'가 너무나 가여워서, 마치 지금 '어린 나'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듯이(이미 성장해 버린 내가 아닌 여전히 어린 나, 말이다.) 그렇게 가슴이 아프다.


이 시를 쓸 때 시인의 마음이 그랬을까. '빈집'의 마지막 행,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에서처럼 "이별을 해서 슬프다.", 가 아니라 " '이별한 내 사랑'이 가엾다.", 는 그 느낌인 것이다.


가난한 화자의 엄마의 삶이 고달팠음은 '열무 삼십 단'에서 드러나지만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과 그리움의 주체는 어린 아이인 화자이다. 해는 저물어 밤에 가까워지고 차가운 방에서 '찬밥처럼' 몸도 마음도 차디찬 채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 엄마가 늦게 온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소용이 없다. 엄마의 힘든 삶, 지친 발걸음 소리는 '배추잎 같은 발자국 소리 타박타박'으로 표현된다. 지친 엄마라도 소년에겐 세상의 전부이다. 엎드려 숙제를 하던 소년은 결국 빗소리를 들으며 훌쩍인다. 이러한 날들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다. 소년은 이제 성장하여 '아주 먼 옛날'이라고 회상하고 있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장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리라. 화자는 성인이 되어 회상하는 형태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이 시는 어린 소년이 당시에 느끼던 감정을 지금도 느끼듯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듯이 묘사한다. 제목마저 '엄마 생각'이 아니라 '엄마 걱정'이다. 성인이 된 내가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시가 아니라 소년이 엄마가 오고 있을까, 걱정하고 있는 시인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기다리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아랫목'이 아닌 '윗목'일 수밖에 없다.



섬집 아기, 한인현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엄마 걱정'에서 충분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외로운 소년을 발견했다면 '섬집 아기'에는 아기와 엄마의 마음이 모두 뭉클하다. 화자는 아기와 엄마의 풍경을 차례로 묘사한다.

1연은 아이이다. 아이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온 세상인 아이는 굴 따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지만 엄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올 생각을 하지 않고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아기는 엄마를 기다리며 잠이 든다. '엄마 걱정'과 달리 아기가 느낀 상실감이나 두려움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노래를 흥얼대며 한 번도 이 노래가 슬프다는 생각을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쨍한 햇살 속에서 운전을 하다 바로 이 부분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에서 어찌나 슬프던지. 결국 엄마의 품에서 웃으며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쓸쓸하게 혼자 잠이 든 것이다.

2연은 엄마이다. 엄마는 굴을 따러 나갔지만 혼자 두고 온 아기의 생각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채 차지 못한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따로 맡길 수도, 그렇다고 아기를 돌볼 수도 없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처지의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오고 있다.

이후 둘은 어떻게 됐을까. 아기와 엄마 사이의 충만한 사랑으로 가난도, 엄마의 미안함과 아기의 그리움도 이겨낼 수 있었기를.


추억에서, 박재삼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엄마 걱정'은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의 외로움이, '섬집 아기'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기와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 사이의 애틋함이 주인공이라면 '추억에서'의 주인공은 확실히 '어머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가난하고 아름답던 젊은 우리 어머니'.


어스름 하늘의 빛깔은 차분하면서 아름답고 또한 슬프다. 이 푸른 색의 이미지, 1연의 '어스름'(이 어스름의 빛깔은 또한 바다의 빛깔과 같다)은 별밭, 진주 남강, 달빛 받은 옹기전'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시의 화자가 성인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어린 화자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어머니의 고됨과 사랑을 성인이 된 남자가 되뇌이며 부르는 그리움의 노래. 어린 시절 '울엄매야 울엄매'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그래서 어린 소년의 것이기도 하면서 이제 당시의 젊은 어머니만큼이나 나이든 성인이 불러보는 이름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어스름이 깔려도 팔리지 않는 생선과 닿지 않는 은전, 그 가난은 오누이만 두고 온 골방으로 가려는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았으리라.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의 주체를 '오누이' 로 대체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손 시리게 떠'는 주체마저도 어머니로 읽힌다. 오누이와, 오누이와 함께 할 희망인 별밭은 너무나 멀고 오누이가 머리 맞댄 골방으로 가는 어머니의 발걸음, 돌아가는 밤길 차가운 날씨도 날씨이지만 어머니는 못다 판 생선과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미래와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손 시리게 떨며 왔으리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어머니의 마음은 글썽이지만 '반짝'이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엄마 걱정'보다 한결 따뜻하다. 어머니의 삶은 고되고 가난하며 아이들은 어머니 곁에서 충분한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그래서 '글썽이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화자는 어머니가 어린 화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장면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되짚는다. 그래서 그 사랑은 말이 없는 '반짝임'인 것이다.


모든 어머니가 가난한 것도 아니고 같은 무게로 '글썽이고 반짝'이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유년 시절에 상실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엄마 걱정'이나 '추억에서'에 뭉클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행복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아파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것만큼 아픈 것도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특별한 사연이 없어도,



'엄마 걱정'의 소년은 어린 아이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섬집 아기'는 그 사람들에 더해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 안타까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추억에서'는 그러한 엄마의 마음에 감사함과 감동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충분히 울릴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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