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종로 5가', '철도원 삼대'(황석영)와 함께 읽는

by 쉼표


이육사 시인의 ‘꽃’이나 ‘광야’를 읽을 때처럼,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읽을 때처럼, ‘껍데기는 가라’를 읽을 때에 나는 준비가 필요하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나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보다 더 어렵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한편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지 않나, 싶다. 말하자면, 우리는 부정한 세상에 분노를 느끼지만 어쩌면 더 크게 두려움을 느끼며 살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 부정하지만 기껏 나 하나보다는 훨씬 큰 세상을 향해 크게 소리치는 열정이나 믿음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푸는 일이 이 시를 읽기 위해 나에게 먼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생각해 보았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치는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러던 중에 읽게 된 시가 ‘종로 5가’이다.



‘껍데기는 가라’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어쩌면 당신에게도 필요한 시, 종로 5가


종로5가(鍾路五街)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肥料廣告)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다.




1960년대 도시의 풍경을 담아낸 시이다. 첫 장면부터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를 먼저 떠올리고, 그 소년의 겨우 ‘국민학교를 나왔을까.’ 싶은 키와 겁먹고 어리숙한 표정을 떠올리고 ‘새로 사 신은 운동화’를 가슴에 품고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직 철없이 부모 곁에 있어야 할 이 어린 소년은 낯선 도시에, 군중 속으로 던져져서 움츠린 채로 화자에게 길을 묻고 있다. 이 아이를 보낸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 먼 길 갈 아직 어린 아이를 위해 없는 형편에 새로 사 주었을 운동화와, 배고플 서울 생활을 떠올리며 챙겨주었을 고구마. 이 아이의 불안과 순수함과 그 앞에 필연적으로 펼쳐질 고된 삶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소년의 누나와 아버지는 그런 면에서 소년 자신이기도 하다.)




다시 읽는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가 1960년 4.19 혁명으로부터 1연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나와 같은(현실에 순응하고 좀처럼 분노할 용기가 잘 생기지 않는) 사람은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목소리를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위해 이러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을 한 이들의 행위를 ‘나라를 지키기 위해’라고만 이야기했을 때에는 떠올려지지 않는 많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분명하게 책임이 있는 일제의 착취, 그 착취에 앞장서 같은 동네 아저씨를 친구를 배신한 친일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왜 ‘껍데기’는 가야 하는가? 왜 우리는 ‘껍데기는 가라’고 힘껏 외쳐야 하는가? 껍데기, 4.19 당시에 맞섰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 독재, 분단과 여전한 외세의 간섭... 이러한 부정한 권력의 유구한 역사 ‘껍데기’를 왜 우리는 거부해야 하는가? 그것은 종로 5가의 소년과, 누이와, 아버지를 언제나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정의’와 ‘역사’,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아니라 누이와, 어머니와, 친구와 매일 마주하는 나와 닮은 사람들을 위해 껍데기는 가야 하는 것이다.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 곰나루(동학농민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나루)를 불러온 것은 반봉건, 반외세를 외친 민중의 정신이 4.19와 닿아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의 의미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아사달이 백제의 석공으로서 신라의 석가탑을 만들며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와 이별하게 되고 남편 아사달을 기다리던 아사녀가 연못에 빠져 죽는다는 설화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석되는 이 아사달 아사녀 이야기까지, ‘껍데기는 가라’의 외침은 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사달 아사녀의 입장에서 보면 외세(신라)로 인해 비극적인 운명(두 사람의 이별과 아내의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4.19, 동학농민운동과 연결된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 신동엽의 오페레타 <석가탑>에서 “아사달? 우리 겨레의 아득한 옛날 조상들 이름 같구료. 그때 사내들은 아사달, 여인들은 아사녀로 불렀다 하오.”라는 왕의 대사를 통해 아사달과 아사녀를 우리 민족의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 아사달과 아사녀는 껍데기는 벗어던진,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순수한 민중, 민중의 원형이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왜 4.19에서 동학농민운동도 모자라 아사달 아사녀까지 호명해야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3연의 1행, ‘그리하여, 다시’에 있지 않은가. 껍데기의 역사는 유구하다. ‘종로 5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듯이.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종로 5가’는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민중의 삶의 장면이 그 한 시대의 것만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종로 5가’는 1960년대 민중의 삶을 한 장면 보여 주는 데에서 나아가 그러한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히 묻고 있다. ‘이조오백년’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나는 문득 최근 읽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가 떠올랐다.



1945년 9월 9일 오후 세시 사십오분,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조선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남조선점령군 미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지통치권을 넘겨받는 조인식을 진행했다. 그것은 항복문서 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식민통칭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 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과 미군 남조선점령군 사령관을 통치권 이양 문서에 나란히 서명했다. 부근에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경성에서도 일반 대중이 해방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일왕의 방송이 나간 다음 날인 8월 16일이었다. 9월 9일에는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국기교체식이 있었지만 지방에서는 10월 중순까지도 일장기가 여전히 게양되어 있었다. 미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는 9월 14일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사법 처리하지 않고 해임했고, 남조선 각 지방의 일제 관리들을 10월 17일 해임했다. 9월 19일, 미점령군에게 식민통치권을 넘겨준 조선총독과 관리들은 미군 측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철도원 삼대', 황석영


일제강점기 후 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승승장구하였는가,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은 왜 받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이 두 문단을 읽으며 완전히 해소되었다. 우리의 역사는 ‘변한 것은 없었다.’


이토록 유구한 껍데기의 역사를 직시했던 시인은 ‘그리하여, 다시’라고 말하고 있다. 껍데기의 역사만큼 오래된 알맹이와, 아우성과, 아사달과 아사녀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부정하고 폭력적인 권력에 맞서는 알맹이와 아우성이 있었고 그 시작에 그 어떤 껍데기도 없던 아사달과 아사녀가 있었다. 이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는 인식이 ‘그리하여, 다시’라는 구절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가 계속될지라도 결국엔 순수한 민중의 뜻이 계속되고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맞절할지니’는 ‘맞절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에 ‘맞절할 것이다.’라는 전망이다. 그리고 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 ‘미래’의 것이 아닌 오래 전, 민족의 원형 아사달, 아사녀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시인의 희망,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끝까지 말한다.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고.


‘껍데기’는 ‘쇠붙이’로 변주되며 강렬하게 이 시는 끝맺는다. 나는 민주화 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옳은 뜻을 위해 위험에 맞선 사람들을 보며, 그리고 문학 작품 속에서 그들을 읽으며 궁금했다. 과연 그들은, 정말 ‘승리’를 믿었던 것일까?


나는 신동엽 시인이나 이육사 시인의 강인한 목소리, 희망과 의지의 목소리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미래가 올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은 ‘미래’는 ‘언젠가 올’ 미래였지 않나, 라고 생각한다. 곧 다가와서 나 자신의 이러한 행위가 보상받을 만큼 가까운미래가 아니라 언젠가는 올 미래를 믿었던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시인들에게는 긴 시간이, 기나긴 역사가 필요하지 않았나. 짧은 한 사람의 생애 동안에는 이루지 못할 정의를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며 꿈꾸었지 않았나. 그래서 이육사 시인은 ‘까마득한 날’(광야)를 이야기하고 신동엽 시인은 아사달 아사녀까지 거슬러 가야 하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올 미래를 믿는 마음에 얼마만큼이 ‘앎’의 영역이고 얼마만큼이 ‘소망’의 영역이었는지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우리가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치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심지어 이루어진 것이 나의 이익에 보탬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인한 행위는 겉으로 옳게 보이는 행동이라도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 위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겁쟁이이므로 용기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 대다수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국민학생쯤 된 아이가 새 신발을 품에 안고 길을 물어왔을 때 가슴이 아파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로 5가’와 ‘껍데기는 가라’를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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