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1.('답신' 중심으로)

-똑똑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경멸감

by 쉼표

작년, 동료 선생님이 빌려주신 이 책을 읽고 느꼈던 감동이 떠올랐다. 한 번 더 읽어야지, 하고 생각한 것은 이 이야기 속 문장의 섬세함에 대한 감탄보다 화자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의 감정의 결이 나와 너무 닮아 있다고 느낄 때의 위로 때문이었다.


나를 가장 위로하는 작가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면 단연코 최은영.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애쓰지 않아도’로 이어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매력적인 소설. 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더 드러내는 이야기, 더 사회적인 이야기, 그리고 더 깊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 더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책이 그러하듯 이 이야기들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전작보다 ‘더 드러내는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생각을 의도하지 않는다. 노골적인 메시지만큼이나 내가 거북하게 느끼는 것은 뻔한 은유인데 그러한 뻔한 은유가 없어서 좋다. 그래서 읽기에 따라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작가의 생각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책, 책을 읽고 글쓰기가 필요하다면 이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노골적이지 않기에 자꾸 생각나는 이야기, 자꾸 떠올려볼수록 또 다른 생각이 나는 그런 이야기.




1. 똑똑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경멸감


‘답신’의 언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이 소설집을 읽고 할 수 있는 가장 논쟁적인 토론이 아닐까? 내 지인들은 모두 ‘언니’의 삶은 현실적으로 망했다, 거나 적극적으로 개선했어야 옳았다, 라고 말한다. 이 단편을 읽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소설집에서는 이렇게 정말 ‘똑똑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어쩌면 ‘망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고, ‘개선해야 했을’ 삶 속에 자신을 방치하는(방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답신’의 언니는 ‘나’가 네 살일 때 어머니가 떠나 '나'와 함께 고모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어머니가 떠나버린 어린 자매, 전국을 다니며 돈을 버는 아버지가 비정기적으로 집에 왔을 때 그 아이들의 마음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언니와 나는 아빠를 좋아했어. 직접적으로 애정표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빠의 주변에서 놀이를 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아빠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지, 우리를 보고 있는지 살폈지. 아빠가 우리를 재미있는 아이들, 귀여운 아이들로 봐주기를 바랐었나봐. 작은 관심이라도 보여주면 기쁠 것 같았지.
...
언니와 내가 아빠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면서 놀 때 나는 언니가 아빠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하는지 느낄 수 있었어. 언니로서 동생과 잘 놀아주고, 명랑하고, 웃음이 많은 아이로 보이고 싶어한다고, 아빠가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란다고
...
아빠가 언니를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나. 못마땅한 표정. 가끔은 묘하게 웃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얇은 칼로 마음의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어. 말 그대로 아팠지.
...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아빠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어. 그래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상처만 받을 뿐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우리는 떠들다가도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입을 닫았어.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히 행동했지.
-답신 중.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던 자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 가진 언니는 그러나 아버지의 ‘공평한 무심함’ 속에서도 지목받아 상처받는 존재였다. 그런 언니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의류 매장에 취업하고 동생의 파카를 사 주고, 대학에 가라며 결혼하기 전 자신이 모은 돈을 내 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은 어쩌면 ‘망해’ 간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애하던 열다섯 살 많은 학교 선생의 아이를 겨우 21살의 나이에 임신한다. 친정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 앞에서도 거리끼지 않고 행해지는 무시 속에서도 언니는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없’었다며 결혼 생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언니가 낳은 아이에게 쓴 편지가 바로 이 단편 ‘답신’의 내용이다.


동생은 '언니는 똑똑하니까 대학에 가고 은행원이 될' 거라고 말하지만, 결혼 전부터 형부가 될 사람이 언니를 대하는 그 경멸적인 태도에 가슴 아파하지만, 급기야 언니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자신을 데려다 놓고 언니를 보란 듯이 때리는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언니를 지키고자 하지만, 형부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수감될 처지에 놓인 동생을 두고 언니는 법정에서 ‘남편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정말, 언니의 인생은 망해 버린 것일까.


생활 능력이 없이, 무시당하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삶은 ‘망한’ 삶일까? 그것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망한 삶인지부터,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 은근히 깔린 우월감, 자만심, 그리고 경멸감- 학부모, 경애의 마음(김금희), 손톱(권여선)


환경 미화원을 보며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저렇게 안 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일화를 들어 본 적이 있다. ‘경애의 마음’에서 E는 작은 이불을 아이에게 덮고 구걸을 하는 노숙자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불행하네’라고 말하는 경애에게 ‘니가 뭔데 그렇게 말해’라고 한다. 타인의 불행을 교훈삼아 자기 자식의 동기를 만드는 잔인함, 타인의 삶을 ‘불행’으로 판결 내리는 우월의식.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겹쳐 보였던 것은 권여선의 ‘손톱’이었다. ‘손톱’ 속의 화자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고 언니와 살다 언니에게마저 버림받아 홀로 남겨진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 여자는 언니가 가지고 도망간 대출금과 옥탑방 보증금으로 대출받은 합계 천오백만원을 상환하기 위해 얼마를 아껴 어떻게 대출금을 갚을지를 계속하여 계산한다. 그 계산의 내용과 그 계획이 너무나 구체적인데 그 구체적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이 너무나 낮다는 것을 독자는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손톱’ 화자의 행동, 이를테면 돈 500원 차이로 짬뽕 하나를 못 사 먹고 나오거나 휴대전화 매장의 3층을 카페처럼 이용한다거나 엄지 손톱 아래 냉동치료로 7만원을 소비하게 되자 ‘다시는 안 온다’며 손톱없이 살겠다고 하는 모습들. 그 구체적인 가난의 내용을 보며 나는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하는 타인의 삶을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은근히 업신여겼었나, 돌아보았던 것이다.


‘답신’의 화자는 자신이 언니에게 느껴던 그 감정, 은근히 깔보고 판결했던 감정을 고백한다.



언니의 삶을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망가진 것으로 취급했어. 내가 언니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언니를 가르치려 했어. 언니의 삶이 망했다고 판결했어.
그것이 나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준 언니에게 내가 한 보답이었다.


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감정’, 이러한 ‘경멸감’.

나는 ‘답신’의 화자가 그러했듯이 ‘똑똑하지 못하고 착하기만 한’ 그들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나.’ 하는 마음, 그렇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울수록 드는 마음 ‘그렇게 착하게 사니까 당하지.’는 애정과 안타까움이 분노와 경멸감으로 이어지는 쉬운 경로를 따른다.


정말, 언니의 인생은 망해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망한’ 삶이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한’ 삶이라고 판결해 버릴 수 있는 것이가.


언니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가? 간단히 타인의 삶을 판결하지 않기 위해 생각해 본다.


착한 언니는 동생을 위해 일을 하는 대신 자기 삶을 개척하기 위해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해야 하지 않았을까? 열다섯이나 많은 학교 선생님이 이성적으로 접근할 때 나쁜 어른임을 현명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임신을 했더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더 나아가 결혼했더라도 때리는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하지 않았나?

이러한 질문으로 그녀의 삶을 ‘망했다’고 판결하고 그 책임이 엄연히 ‘그녀에게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쉽게 그들에게 그렇게 판결내렸던 나를 발견한다. 사연이 안타까울수록 더 경멸의 심정을 담아서, ‘바보같이 착한 건 죄이다.’라고도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언니’의 삶을 지켜보느라면,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는가 싶다. 유년시절 느꼈을 언니의 결핍감을 떠올리면 자신을 무시하는 열다섯살 많은 남자 선생님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동생이라도 따뜻한 옷을 입고 꿈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때리는 남편이라도 아이를 키우며 가정 속에 있고 싶었던 소망이 모두 필연적이었으리라 생각이 드는 것이다.(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라는 질문은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 얼마든지 편하게 할 수 있는 문제제기이다. 안 그럴 수도 있는지, 우리는 정말 아는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어려운 길로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눈부시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최상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누가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면, 우리는 그렇게 간단하게 타인의 삶을 판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면 나를 때리거나 존중하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그런 아빠를 가진 아이를 만드는 것보다 가난한 싱글맘의 아이로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나 그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심지어 더 옳은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언니’와 같은 사람. 착하고, 바보같이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은 이 단편집 곳곳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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