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2.('몫' 외)

- 우울한, 또는 결코 우울하지 않은 이야기.

by 쉼표

2. 착해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주인공 ‘기남’의 삶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하며 더 슬퍼지는 이유는 ‘기남’이 조금도 공격적인 면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가혹한 상황에 놓여 상처를 받아왔음에도 누구에게도 화내지 못하는 사람. ‘기남’이 친딸인 ‘우경’보다 ‘진경’을 마음으로 가깝게 느끼는 이유는 ‘진경’도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남의 남편은 전처와 사이에서의 자녀 ‘진경’이 있었고 기남과 남편 사이에서 딸 ‘우경’이 태어났다.) 가슴 아팠던 문장, 이렇게 바보 같고 착하고 여린 사람을 묘사한 문장은 이러하다.


우경은 진경이 여덟 살 때 태어났다. 낯가림이 심하고 조용한 진경과 다르게 우경은 활당하고 적극적인 아이였다. 골목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 때도 꼭 대장 노릇을 했다. 남편은 그런 우경을 눈에 보이게 편애했다. 진경에게는 작은 칭찬 한번 해주지 않고 엄격했지만 우경에게는 다정했고 진경이 있는 앞에서 우경을 칭찬하기를 좋아했다. 둘이 다툴 때에도 언제나 ‘언니가 잘못한 거야’라고 판결을 내렸다. 우경이 뛰어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진경에게 어린 동생 하나 제대로 지켜보지 않고 뭘 했느냐고 화를 냈다. 진경은 그런 남편에게 맞서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그애는 늘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


당해도 당해도 공격할 줄을 모르는 사람. 어떠한 의도 없이 본능처럼 타인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래서 곁에서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짜증스러워지는 사람. 그래서 저 정도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래, 더 당해 봐야 정신차리지, 라는 못된 마음까지 솟게 하는 사람. 기남 역시 가족 모두에게 늦게 태어난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고, 자신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족처럼 여기는 거라 믿고 싶어하고, 급기야 자신을 버린 가족의 모임에 참여하였다가 싸늘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바보같은 사람이다.



‘파종’의 ‘오빠’도 그런 사람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혼한 동생의 딸(조카)를 돌보며 동생이 글쓰기에 전념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면서도 실수로 잘못 둔 호미에 조카가 다친 일이 생긴다.


처치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간 그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투명 인간 보듯 대했다. 그가 질문하면 짧게 답하고 침묵했다. 한동안 그녀는 그에게 냉정하게 대했고, 소리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 잔인하게 말했다.
그가 언제나 자신에게 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대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학대를 당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 애정을 거절당하고도 여전히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들, 자신을 무시하는 배우자를 만나 불행해질 것이 뻔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

이 소설은 그들의 작고도 간절한 소망과 소망의 좌절, 그들이 겪는 멸시를 섬세한 문장으로 그린다.


인간은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에게는 더 함부로 하고,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여 뒷바라지한 언니의 삶에 대해서도 ‘망친’ 것이라고 판결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의 인간은 아무리 착취를 당하고 학대를 당해도 그것을 타인에게 되갚지 않고 그저 자신의 상처로 남겨두며 누군가를 지켜주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으로 돌아오는 것이 은근한 경멸감이라도, 그들은 늘 그렇다.


여전한 다정함과 살아냄. 어떤 인간이 더 아름다운가.



3. 소수자, 페미니즘, 높은 수준의 도덕성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여성이 소수라고만 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여전한 약자이며(화자와 여교수가 살았던 ‘용산’의 철거민들이 그렇듯) 그들이 걷는 길도 약자의 길이다. (소설 곳곳에 학대받는 여성이나 학대받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어머니의 부재와 신체적 학대를 행하지 않고도 충분히 폭력적인 아버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모를 읽어내려갈 때는 장면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몫’에서 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페미니즘의 문제와 어려움에 처한 여성을 돕기 위해 ‘글쓰기’ 대신 실천가의 삶을 선택한 희영은 홀로 길을 걷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삶을 보여 준다. 그러나 과연 독자들은 이러한 삶에 공감할 수 있을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은 평균 이하의 도덕성보다 더 공격받기 쉽고 더 공감받기 어렵다.

너의 삶이 정말 그렇게 도덕적인가, 라는 공격은 그래서 아주 흔하다. 타인의 위선을 지적하는 날카로움을 가장한 이러한 목소리는 100%의 희생이 없는 한, 너와 나는 똑같은 속물이다, 그러므로 너는 위선적이다, 라는 목소리로 쉽게 이어진다. '몫'에서의 정윤을 비롯한 편집부 학생들마저도 말이다.


희영이 편집부에 '여성문제'를 주제로 글쓰기를 하겠다고 할 때의 정윤의 반응(네가 과연 그녀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느냐, 네가 그녀들을 정말 이해하고 아느냐)이 그렇다. 문장만으로는 그래서 전혀 틀린 것이 없다. 이후 정윤의 그 말을 되새긴다는 희영의 대사를 통해서도 타인의 삶을 범주화하고 이해한다고 말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우스운 일임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래서, 약자의 위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그 문제에 공감하는 것이 위선이 되는가? 여성문제가 지속적인 문제라서 시의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덜 다루어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버리고 문제 해결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크든 작든, 가질 수 있는 만큼의 선의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영이 다른 사람과 달리 유독 정윤에게 실망하고 관계를 끊은 것, 죽음을 앞두고 화해를 청한 것을 나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했다. 정윤은 높은 도덕적 잣대로, 또는 주장하는 바와 주장하는 주체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는 비겁함으로 희영을 비판하지만 결국 결혼할 남자의 성취를 위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포기한다. 더구나 그 결혼 상대는 정윤의 뛰어난 능력에 은근한 질투를 가진 사람이다. 참 모순적이면서도 흔하지 않은가. 우리는 대체로 희영보다 정윤과 가깝지 않나. 아니 정윤만이라도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참 좋은 곳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사회 의식이 있는 편집부 학생들이 이 단편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이 이야기하는 바가 짐작된다. 사회정의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정의에 누구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순을 보여주며 자기를 성찰할 것을, '몫'에서는 요구한다.(사실 사회정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득해도 희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마음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우울하다고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으나 주위에서 우울하다고들 하니 우울한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건 그냥 현실 아닌가?


이 이야기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은 상처받는 사람들(‘답신’의 언니,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기남과 진경, ‘파종’의 오빠, ‘이모에게’의 이모와 엄마)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답신’의 동생, ‘파종’의 동생)의 흐름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았을 때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거나(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껴안는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모습(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착취였을 때는 더 무심하게 더 가볍게 대하는 다수의 태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몫, 이모에게)는 분명히 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그렇지만 이건 새로울 것도 없는, 너무나 흔한 장면이지 않은가?



나는 어쩌면 우울하지 않은 장면으로 이 인물들을 기억하고도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여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더 약한 존재를 지켜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상처받은 약자임을 이 소설은 또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우울한 세상에 기여하는가? 우울한 그들인가, 우울한 그들을 매사 외면하는 우리인가.


- 그리고 어쩌면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이 맨 마지막 작품인 것도 그렇게 기억해주길 바라는 소망처럼 보인다. 다정한 할머니와 손자가 무척 따뜻하고 애틋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울하지 않게 이 이야기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너무나 겸손하고 어른스럽고 사랑스러운, 상처받으면서도 결코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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