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구별지어지는 고통과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에 대해.

by 쉼표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1달에 300만원씩 버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이 사회의 일원이 행복할까? 평균적으로 200만원을 버는 사회에서 300만원을 버는 사람이 행복할까? 평균 400만원을 버는 사회에서 300만원을 버는 사람이 행복할까? 이때, 300만원이 주는 삶의 질은 객관적으로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나는 어떤 사회에 살 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일까? 또는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사회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느낄까? 격차가 적다고 느낀다면 차이를 더 키워서 상상할 수 있다. 600만원을 버는 사회에서 1200만원을 버는 사람, 600만원을 버는 사회에서 200만원을 버는 사람, 600만원을 버는 사회에서 600만원을 버는 사람. 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물을 수 있을까? 얼마를 버는지가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이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계급을 나누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돈’이라는 것이 얼만큼 힘이 있는지 보여준다. ‘돈’이나 ‘계급’이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지배하고, 마음을 좌지우지하며, 관계마저 갈라 놓는지 말이다.


‘돈’이 우리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범위


‘돈’은 우리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 실직 후에도 생계 걱정은 없는 삶(숲속 작은 집)도, 자신의 꿈이었던 여행 전문 서점 운영에도 불행한(레몬케이크) 것도 돈 때문이다.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밤에도, 주말에도 대리 기사로 일했던 것(빗방울처럼)도 그래서 결국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게 만든 것도 돈 때문이었다. 정말 ‘돈’이란 중요한 것이다. ‘돈’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은주도 여행지 숙소의 서비스에 이상을 느꼈을 때,


‘-중요하지, 돈은.’,

‘-실은 제일 중요하지 뭐.’


라고 되뇌일 정도로 돈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결코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란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나타나는 박탈감’을 말한다. 박탈감은 감정이고 그 원인에 ‘다른 대상과의 비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상대적 박탈감은 전처와 연애 감정을 주고 받는 듯한 상대 남자가 자신보다 그럴듯한 인간이라는 설정(이물감)뿐만 아니라 똑같이 실직했으나 남편이 부자인 동료(숲속 작은 집)에게도 느낀다. 부동산 가격이 돌이킬 수 없게 올라버린 현실에서 세입자가 동년배의 자가 소유자를 볼 때(좋은 이웃)에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느낀다. ‘생활’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우월의식', 그리고 돈을 바라보는 이중적 태도


그런데 이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를 전제로 하기에 ‘우월의식’과 실은 무척 가깝다. ‘상대적 박탈감’은 ‘우월의식’과 동전의 양면처럼 꼭 붙어 있는 것이다.


남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은주는 ‘우월의식’을 경계하며 여행지 숙소의 직원을 ‘메이드’라 부르기를 꺼려하고, 팁을 봉투에 담아 드리며, 정중한 자세로 대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숙소의 물건이 어지럽혀진 이유의 원인은 ‘돈’이었으리라고 오해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숲속의 작은 집) ‘돈’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그 생각의 저변에 무엇보다 ‘돈’이 중요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음은 마지막 순간 은주의 오해를 폭로함으로써 독자는 알게 된다. ‘돈’이 도덕성마저도 해치리라고 생각해 버린 그 오해의 이면에 은주의 ‘우월의식’이 있었음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마저도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님 자기 자신이었음을 은주는 깨닫는다.


‘좋은 이웃’은 더 신랄하게 ‘돈에 대한 시각’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화자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요즘은 풍경이 다 돈으로 보인다’는 남편에게 ‘감사하며 살자’고 말하고, 독서 수업에서는 ‘공동체’나 ‘연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동년배, 또는 그 이하 세대의 경제적 여유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장애를 가진 자신의 학생이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허탈함마저 느낀다. 장애를 가진 학생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던 자신의 선의가 실은 우월 의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이후 깨닫게 된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다른 대상에게 ‘우월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우월 의식’이 실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중성마저도 없는 '순수한 또는 노골적인' 우월의식

- 기초 수급자와 패밀리레스토랑, 그것이 못마땅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이 자연스러운 ‘우월 의식’, 아무리 애쓰고 선한 사람이고자 해도 은근하게 깔려 있는 이 부도덕한 근원으로 비롯된 ‘행복감’보다 '노골적인, 순수한 우월 의식’을 묘사한 작품이 바로 ‘홈파티’이다.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온라인에서 확산된 적이 있었다. 기초수급자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다른 손님이 그 레스토랑에 항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기초수급자가 분식집이 아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느냐’라는 것이 요지였다. 왜 패밀리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지, 그 식사가 사실 수급자의 지원 비용이 아니라 그 지점의 사장님의 호의로 가능한 것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빼고 생각하더라도 황당한 불쾌함이 아닌가. 그 불쾌함의 근원에는 ‘기초수급자’와 ‘나’는 달라야 한다, 라는 생각이 있다. 수급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며 그것이 수급자가 아닌 ‘나’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홈파티’는 ‘우월 의식’과 ‘그들과 우리의 구별이 마땅하다는 의식’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 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의 교묘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 보육원에서 자립을 앞두고 지원금을 ‘명품 가방’을 사는 데에 쓰는 청년들을 허영만 있고 금융 감수성이 없는 철없는 아이로 취급하고

- 저렴한 재료로 만들어 질적으로는 떨어지지만 모던한 취향을 반영한 가구를 비웃으며

- 주식 투자에 시간을 쏟으며 자산 가치의 상승을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홈파티’에 모인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 ‘결 맞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래 계층의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연극 배우인 ‘이연'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걱정과,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과시하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배우치고 소탈하다’는 평가는 ‘이연’을 초대한 ‘이연’과 가까운 계급 출신일 ‘성민’에게 ‘이래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한 이야기와 같은 명백한 ‘구별 짓기’이며, 그 구별은 명백하게 위와 아래를 나누는 것이다. 그 구별의 위에 ‘그들’이 있고 ‘그들’은 사실 부도덕하고(주식 투자의 성공에 내부 정보가 작용했음을 암시), 아래 계층의 사람들의 빈곤이나 취향이 그들의 무능 탓이 아니며(그들의 부유함이 그들의 능력이 아니듯이, 그들의 고급 가구가 그들의 취향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왜곡되어 있다.(보육원의 청년들 선택의 이유에 대한 추측이 그들이 얼마나 쉽게 나와 다른 이들을 단정짓는지를 보여주듯이)


무엇보다 그들이 ‘비호감’인 이유는 그들의 교묘함이다. 그들은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바로 그 ‘베풂’을 통해 ‘우월감’을 만끽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이 ‘약탈’이 아니라 ‘능력’의 결과인 것처럼 말한다. 이연이 잔을 깨뜨렸을 때 여주인은 ‘베풂’(잔을 깬 것을 이해함)을 통해 ‘약탈’(어쩔 줄 몰라하는 이연)함으로써 원하는 것(결국 이연은 가질 수 없을 우월의식)을 모두 쟁취한다.


계층, 비교, 구별, 그로 인한 고독은 불가피한 것일까.


이 단편집은 주로 경제적 원인으로 인한 계층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를 구별하게 하는 것은 계층만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좋은 이웃)의 구별은 ‘시우’가 ‘코로나’로 모두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반기게 만들고, 세대 갈등(이물감)은 기태의 후배 직원이 ‘나의 아버지도 가난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힘들다는 것이다’라며 항변하게 만든다. 우리는 구별되지 않는 고통, 즉 나와 구별되지 않는 사람의 고통에서 위로 받는(‘안녕이라 그랬어’의 ‘나’가 ‘헌수’를 그리워한 이유가 같은 고독을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결이 맞는’ 사람이란 결국 ‘상황이 같은’, ‘구별되지 않는’사람인 것일까?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는 마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번 울컥했다. 하나는 ‘좋은 이웃’에서 주인공이 조세희의 ‘난쏘공’의 한 구절을 읽는 부분이다.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그리고 ‘레몬케이크’에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건강 관련 설문에 응답한 내용이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예.
앞날을 걱정할 때가 많다.
예.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어렵다.
예.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잘 지내는 것 같다.
예.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아니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
예.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구별 짓는 존재, 그래서 박탈감도 느끼고 우월감도 느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사실 더 많은 부분에서 한편인 존재, 어쩔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세대라도, 나보다 훨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결국 생각보다 비슷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작은 것에서 위로받는 존재, 그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염려(빗방울처럼)로부터 자신의 생을 다시 시작해볼 마음을 가져볼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만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더라도 나와 비교한 타인에 대해 단정해버리는 대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염려해 보아야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안녕’을 염려해주라고, 실제 ‘아임영’이라고 말했을지라도 우리는 ‘안녕’이라고 듣고, ‘안녕’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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